제페토 통해 피해자에게 접근한 38살 남성

온라인그루밍 처벌법 있지만, 사전단계엔 적용 어려워

한국과 캐나다 경찰 모두 신고했지만 대응 달라

제페토 운영하는 네이버는 즉각조치 하지 않아

 

 

‘김하은(가명·11)은 지금 이 시간 부로 ㄱ의 소유물이다.’ ‘김하은은 절대 다른 남자를 만나지 못하며 공부에만 전념한다.’ ‘김하은은 19세가 되면 ㄱ에게 시집을 간다.’

 

어머니와 캐나다에서 지내고 있는 초등학생 김하은양은 ㄱ씨의 강요로 통제적 유형의 폭력을 나열한 결혼서약서를 썼다. 30대 남성 ㄱ씨는 지난 1월 초부터 메타버스 플랫폼 ‘제페토’를 통해 김양에게 접근했다. 처음엔 ‘공주님·왕자님’ 놀이를 하자더니 시간이 지나 가상 연인관계를 유도했다. 입 벌린 사진, 뽀뽀 사진 등을 달라고 했고 집 주소, 전화번호 등 개인정보를 차곡차곡 수집해갔다. 아이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 제페토 아이템을 사주기도 했다. ㄱ씨가 피해 아동에게 보낸 메시지는 “숙녀로 보인다” “네가 존댓말 쓸 때면 흥분된다” “(사귀는 사이이니) 행동을 확실히 하라” 등이었다. 피해 아동을 심리적으로 지배하는 가스라이팅, 길들임에서 성 착취로 이어지는 온라인그루밍 성폭력 등의 전형적인 요소가 드러난다. ㄱ씨와의 대화를 놀이로 여겼던 김양은 뒤늦게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을 알고, 불안해하고 있다고 부모는 전했다.

 

메타버스를 매개로 한 아동·청소년 성착취 우려는 현실이 됐다. <한겨레>는 김양의 부모가 피해 사실을 알게 된 뒤 겪은 일들을 통해 메타버스 성범죄 발생시 뒤따르는 문제들을 짚어 봤다.

 

■ 신고 : “현행법 적용이 어렵다”

 

김양의 아버지는 지난달 30일께 아이의 피해 사실을 인지하고 경찰에 신고했다. 돌아온 대답은 “현행법으로 적용하기엔 모호하다” 였다. 이달 4일에는 조서를 쓰러 경찰서까지 찾았지만 “비슷한 선례도 없을뿐더러 피의자가 외국에 있어 어떻게 해야 할지 지방청에 물어보겠다”며 김양의 아버지를 돌려보냈다. ㄱ씨는 현재 미국에 체류 중인 것으로 파악된다.

 

 

메타버스 플랫폼 ‘제페토’ 채팅방에서 30대 남성 ㄱ씨가 초등학생 김하은(가명·11)양에게 결혼서약서를 쓰도록 요구하는 상황. 김양 아버지 제공

 

국내에는 온라인그루밍 처벌법이 있다. 지난해 9월24일부터 시행된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청소년성보호법) 제15조의2는 19살 이상의 사람이 정보통신망을 통해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온라인그루밍을 하면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한다. 그러나 김양이 겪은 사건은 이 법을 적용하기 어렵다. 청소년성보호법 제15조2는 온라인그루밍을 ‘온라인에서 아동·청소년을 성적으로 착취하기 위한 목적으로 △성적 욕망이나 수치심, 혐오감을 유발하는 대화를 지속적·반복적으로 하는 행위 △성적 행위를 하도록 유인·권유하는 행위’로 정의한다. 신민영 변호사(법무법인 예현)는 <한겨레>에 “본격적인 성착취가 일어나기 전인 사전단계에서는 이 법을 적용하기 힘들다. 성적인 대화를 하거나 그런 행동을 유도하는 등 더 직접적인 상황이 있어야 처벌하도록 돼 있다”고 했다.

 

ㄱ씨와 같은 행위가 심각한 아동 성범죄로 이어질 수 있는 만큼 법안을 보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김양의 아버지는 <한겨레>에 “사전단계에서 막아야 큰 피해를 막을 수 있지 않나. 아동 대상 성범죄에서만큼은 더 엄격한 대응이 필요하다”고 했다. 국외에서는 성적 그루밍 행위를 모두 범죄로 보고 강력하게 처벌하고 있다. 영국의 경우 ‘성범죄법’(Sexual Offence Act) 등에 따라 노골적으로 성적인 표현을 쓰지 않았더라도 장기적으로 봤을 때 성적 만족감을 얻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그 대화 자체만으로 처벌할 수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도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이후 성적 행위를 참여시킬 목적으로 관계를 형성하는 행위, 또는 선물이나 호의를 베푸는 행위 등도 범죄행위로 간주한다.

 

■ 수사 : 너무도 달랐던 한국·캐나다 경찰 대응

 

김양의 아버지는 수사기관의 안일한 대응도 문제라고 꼬집었다. 피해자 가족에게 피해 사실을 입증할 증거를 요구하고, 절차 검토로 수사가 지연됐다는 게 그의 증언이다. 캐나다 경찰은 달랐다. “한국 경찰과 (아이가 체류 중인) 캐나다 경찰에 같은 날 신고했다. 캐나다 경찰은 신고 당일 한국말이 가능한 직원과 함께 아이 엄마와 아이가 거주 중인 집에 출동했다. 그날 바로 포렌식을 하겠다며 아이의 휴대전화를 회수했고, 아이가 다니는 학원 등에 ‘모르는 사람에게 아이를 인계하지 말아달라’고 안내를 했다고 하더라.” 캐나다 경찰은 현재 ㄱ씨가 미국에 있는 것으로 파악해 미국 경찰과의 공조 수사에 착수한 상황이다.

 

해당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일산동부경찰서 여성청소년과 관계자는 “피의자가 해외에 있어 관할 문제 등 검토할 문제가 있었다. 캐나다 경찰과 공조하기 위해 네이버 쪽에 압수수색 영장도 집행했다”고 해명했다.

 

김양과 연락이 닿지 않자 ㄱ씨가 보낸 채팅(왼쪽), 메타버스 공간에서 만난 김양과 ㄱ씨의 캐릭터. 사진 김양 아버지 제공

 

■ 플랫폼 대응 : 의무는 없으니 즉각 조치도 없다?

 

온라인 플랫폼 사업자에 대해서도 책임이 강화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제페토의 운영사 네이버제트는 금칙어 설정, 사이버범죄 수사 의뢰 방법 공지 등을 통해 메타버스를 매개로 한 범죄에 대응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론 부족하다는 지적이 잇따른다. 김양의 아버지도 “피해 사실을 인지한 당일 제페토 쪽에 조처를 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즉각적인 답은 없었다. 법적 의무가 없으니까 조치도 적극적이지 않은 것”이라고 지적했다. 국회에서는 지난달 18일 메타버스 등 온라인 플랫폼 사업자의 아동·청소년 대상 성범죄 예방 및 피해자 보호 책임을 강화하는 ‘청소년성보호법 일부개정안’(강선우 더불어민주당 의원 대표발의)이 발의됐다. 이 발의안에는 온라인 플랫폼 사업자가 자신이 운영·관리하는 정보통신망에서 아동·청소년에 대한 성착취 대화 등 관련 범죄를 인지한 경우 즉시 수사기관에 신고하도록 하는 신고의무조항이 담겼다.   박고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