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신이의 발자취]  조정래 작가 고 이어령 선생의 영전에

 

 26일 오후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의 빈소.

 

한국 지성사의 큰 별이 떨어졌다. 나이를 초월해서 평생 줄기차게 노력하는 모범을 보인 천재가 떠나갔다.

 

이어령 선생의 부음을 듣고 ‘아, 기어코!’ 하는 안타까움과 함께 가슴이 쿵 울리고 눈물이 울컥 솟았다. 그리고 몇년 전 어떤 제자의 축하 모임에서 “오늘 이 자리가 여러분 앞에 서는 마지막 자리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하셨던 모습이 선하게 떠올랐다. 그때 선생은 항암 치료를 거부한 채 암과의 동거를 선택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 초연한 모습 또한 우리를 크게 가르치는 것이었다. 그리고 뵙지를 못했는데 기어코 떠나시고 만 것이다.

 

선생께서는 문학평론가로서 이 나라 지성사에 첫발을 내딛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대학생 때 유명 일간지에 논설을 써보내 채택되는 천재성을 발휘하며 글 잘 쓰는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어진 것이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의 연달은 출판이었다. 그 책들은 나오자마자 그야말로 ‘낙양의 지가를 올리는’ 대형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건 온 세상이 전후의 가난에 허덕이고 있던 시절에 나타난 기현상이었다. 그러나 이 나라 사람들은 육신의 배고픔에만 허덕인 것이 아니었다. 지적인 허기와 영혼의 목마름도 풀기를 고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선생의 그 책들은 대중의 그런 욕구를 풀어주는 보약이었다. 가난에 찌들어 군복에 검정물을 들여 입고 다니던 대학생들도 그 책을 사 읽는 것이 필수였다. 평론가의 책이 그렇게 많이 읽힌 것은 50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 깨지지 않는 기록이고 신화이다.

 

선생께서 평론가의 임무가 무엇인지를 장쾌하게 보여준 것이 ‘분지’ 필화 사건이다. 남정현의 그 단편을 북한 잡지에서 재수록하는 바람에 뒤늦게 남한에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사건화되었다.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로 삼은 박정희 정권에게 그 일은 시범조로 잘 걸린 사건이었다. 새로 생긴 중앙정보부의 시퍼런 서슬 앞에 작가는 끌려갔고, 재판이 시작되었다. 누구나 기죽어 움츠러들어 있었다. 그때 재판정에 변호를 나선 것이 젊은 평론가 이어령이었다. ‘왜 달을 가리키는데 달을 보지 않고 손가락 끝을 보느냐!’ 이 유명한 변론은 7년 구형을 선고유예로 바꾸어 놓았다. 그 사건으로 선생은 작게는 작가 남정현을 구한 것이었고, 크게는 한국문학을 구한 것이었다. 선생의 그 기개와 용기는 또 하나의 신화가 되었다.

 

선생께서 구설수에 오른 꼭 하나의 사건이 ‘초대 문화부 장관’이 된 것이었다. 그게 노태우 정권이라서 군부독재 타도에 앞장섰던 지식인들 사이에서 비판이 없을 수 없었다. 그때 선생께서 곤혹스럽게 한 한마디가 ‘꼭 해야 할 일을 빨리 쉽게 해치우기 위해서’였다. 그 권력 확보로 바로 한 일이 ‘인터체인지’가 아니라 ‘나들목’, ‘노견’이 아니라 ‘갓길’로 바꾼 것이다. 순우리말의 애정이 묻어나는 그 명칭들을 선생께서 탄생시킨 것임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26일 별세한 이어령 이화여대 명예석좌교수.

 

그리고 나는 그 권력의 은혜를 두 번이나 입었다. <태백산맥>이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검찰의 내사가 시작되었다. 그때 소관 부서 문화부에 의견 요청이 있었던 모양이다. 선생은 어느 평론가에게 ‘신판 홍길동전’이라고 논리 개진을 하라고 일렀다고 한다. 이적 표현물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허구를 다룬 문학작품이라는 것이다. 그 사실을 15년쯤 지나 그 평론가가 지나가듯 말했다. 그때 검찰이 문제삼지 않기로 했던 것이 결코 우연일 리 없다. 그리고 내가 <아리랑> 국외 취재를 가려 할 때 안기부에서는 출국 금지를 확정해 놓고 있었다. 그때 장관으로서 보증을 서서 출국을 시켜준 것이 선생이시다. 선생이 아니었으면 <아리랑>은 태어나지 못했을 것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지구 절반인 그 무대들을 못 갔을 것이니.

 

선생께서는 책임 있는 보수, 가장 폭넓은 보수의 자리를 지킨 진보의 옹호자였고, 민족문화의 개척자였고, 신개념의 구축자였고, 언어의 연금술사였고, 문·사·철의 통달자였고, 강연의 달인이었다. 선생이 비워 놓고 떠나신 자리가 너무 넓고 크다.

 

선생님, 먼 길 부디 평안히 가시오소서. 수많은 사람들이 석별의 꽃을 바칩니다.           조정래/소설가

 

문 대통령, 이어령 교수 빈소 찾아 조문…“우리 문화의 발굴자”

 

SNS에 추모의 글도

 

문재인 대통령이 26일 오후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의 빈소에서 조문을 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26일 저녁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이어령 이화여대 명예석좌교수 빈소를 찾아 조문했다. 초대 문화부장관을 지낸 이어령 교수는 암투병중 이날 별세했다. 향년 89.

 

문 대통령은 빈소를 조문하고 유족에게 “삼가 위로의 말씀 드린다. 우리 세대는 자라면서 선생님 책을 많이 보았고 감화도 많이 받았다. 우리나라의 큰 스승이신데 황망하게 가셔서 안타깝다”라며 위로를 전했다고 박경미 청와대 대변인이 전했다.

 

문 대통령은 이날 에스엔에스(SNS)를 통해 “이어령 선생님의 죽음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애도한다”며 추모의 글도 남겼다. 문 대통령은 “이어령 선생님은 우리 문화의 발굴자이고, 전통을 현실과 접목하여 새롭게 피워낸 선구자였다. 어린이들의 놀이였던 굴렁쇠는 선생님에 의해 서울올림픽 개막식에서 한국의 여백과 정중동의 문화를 알렸다”고 고인을 기렸다. 이어 “우리 곁의 흔한 물건이었던 보자기는 모든 것을 감싸고 융합하는 전통문화의 아이콘으로 재발견되었다. 우리가 우리 문화를 더 깊이 사랑하게 된 데는 선생님의 공이 컸다”고 했다.

 

문 대통령은 “정부가 지난해 금관문화훈장을 수훈한 것이 선생님의 큰 공로를 기리는 일이 되었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남겨주셨다. 그것은 모양은 달라도 모두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고 했다. 이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