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형사재판 파장
지난달 30일,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성매매 입막음 돈 지급 사건에 대해서 유죄 평결이 나왔다. 12명의 뉴욕 시민으로 구성된 배심원단은 약 6주 동안의 재판 과정을 지켜본 후, 범죄 심리가 시작된 지 이틀 만에 만장일치로 트럼프의 유죄를 평결했다. 미국 역사상 형사 사건으로 유죄 평결을 받은 유일한 중범죄자 전직 대통령이다. 뉴욕 맨해튼 형사법원의 후안 머천 판사는 오는 7월11일 형량을 선고하겠다고 했다.
7월11일은 트럼프가 공식적으로 공화당의 후보로 지명되는 전당대회를 나흘 앞둔 시점이다. 가볍게는 집행유예부터 벌금, 보호관찰, 가택연금, 사회봉사, 그리고 여차하면 최고 4년까지 감옥형이 나올 수도 있다. 미국 대선 선거전에서 선두를 달리는 트럼프의 지지율에 어떤 영향을 주게 될지 초미의 관심사다.
트럼프는 4건의 사건으로 형사기소되어 있다. 올해 초 불룸버그와 모닝컨설트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주요 경합지의 유권자 53%가 유죄판결이 나오면 트럼프에게 표를 주지 않겠다고 답했다. 재판이 한창 진행 중이던 지난 5월초 퀴니팩 대학이 실시한 또 다른 여론조사에서도 유죄로 판결 시 트럼프에게 투표하려던 유권자의 6%가 돌아설 수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번 유죄 평결 직전 주요 경합지에서의 바이든은 트럼프에게 약 3% 뒤지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성매매 입막음 사건에 대한 판결이 나온 직후 6월 3~4일 실시된 뉴욕타임스와 시에나 대학의 공동 여론조사에서, 경합 주에서 3% 앞서가던 트럼프와 바이든의 격차가 1%로 줄어든 것으로 조사되었다. 트럼프로부터 돌아선 7% 가운데 3%는 바이든 대통령을 지지하겠다고 했고, 다른 4%는 아직 결정을 못 내렸다고 응답했다. 2020년엔 바이든에게 투표했지만 2024년엔 트럼프에게 투표하겠다고 말한 사람 중 25%가 성매매 입막음 판결의 영향으로 다시 바이든으로 돌아섰다. .
대선이 5개월 남은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다시 지지율을 회복할 시간은 충분하다. 하지만, 트럼프에 대한 유죄 평결이 나온 뒤의 지지율 변화는 바이든에게 미세하지만 의미 있는 청신호가 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6월 5~6일 CBS뉴스와 유고브(YouGov)의 공동 여론조사를 보면, 조사대상의 성인 중 53%가 트럼프는 공정한 재판을 받았다고 답했다. 다수의 미국인은 ‘맨해튼 재판이 조작되었다’는 트럼프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이 정도 판결은 정치인에게는 정치적 사형 선고다. 그런데도 트럼프는 ‘정치적 무덤’에서 뛰쳐나와 백악관을 향해서 뻔뻔하고 강력하게 걸어가고 있다. 그에게는 형사 기소와 유죄 평결이 오히려 백악관 재입성의 촉진제로 쓰이고 있는 기이한 현상도 보인다. 트럼프는 어떠한 이유로든 사람들로부터 관심만 끌면 그에게 닥친 상황을 돌파한다.
트럼프는 “판사가 부패했다”로 포문을 열고 자신에게 씌워진 혐의는 전적으로 조작되었다고 말했다. 심지어는 나라 전체가 조작되었다면서 이제 “미국은 지옥으로 빠져들고 있다”고 말했다. 트럼프는 선거운동본부에 보낸 이메일에서 스스로를 “정치범”이라고 부르면서, 이 판결로 자신을 감옥에 가둔다면 그것은 “국가의 한계점”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2020년 대선 패배 뒤 선거 결과에 불복해 지지자들이 의사당을 점거하도록 부추겼던 ‘1.6 사태’를 연상하게 하는 발언이다. 성매매 입막음 혐의에 대한 유죄 확정 평결이 나온 날, 맨해튼 법원의 트럼프의 곁에는 음란, 폭행, 마약 사범 등으로 이름난 중범죄자들과 중범죄 혐의자들이 몰려들었고, 트럼프는 그들과 공개적으로 만나기도 했다. 평결이 나온 당일 트럼프 캠프에는 정치기부금 약 4500만달러가 온라인으로 모였다. 트럼프는 약 2개월간의 맨해튼 재판 과정에서 증인을 위협하고 소란을 피우고 출두시간을 어기며 판사로부터 경고와 벌금형을 받기도 했다. 트럼프의 소란은 오리려 그의 선거운동에 힘이 되었다. 트럼프의 러닝메이트가 되려는 정치인들이 맨해튼 재판 현장에 몰려들었다. 심지어 하원의장이 재판 현장에 나타나 트럼프의 소란스러운 행동을 지켜보면서, ‘조 바이든 대통령의 차남 헌터 바이든에게 주목하라’며 미디어의 시선을 돌리기도 했다. 맨해튼의 재판이 트럼프의 정치적 생존을 어렵게 할 것이라는 예상과 반대로, 부통령 자리를 탐내는 십여명의 정치인들이 그 반대의 연극에 나섰다.
결국 그렇게 해서 맨해튼 유죄 평결 이후 트럼프의 선거운동 불길은 더욱 거세졌다. 경합주 지지율에선 손실이 있었지만 오히려 지지층을 결속시키고 확대하는 반전을 노리고 있다. 트럼프 후보에 불안해하던 공화당 돈줄들도 안도하는 듯 보인다. 실리콘밸리의 벤처 투자자들이 샌프란시스코에서 트럼프를 위한 모금 이벤트를 열어 하루 저녁에 6천만 달러를 모금했다. 트럼프가 참석하지 않은 가운데서도 플로리다와 앨라배마에서도 모금 행사가 이어졌다. 정치 자금 제공에 가장 신중한 것으로 알려진 블랙스톤 그룹의 스티브 스와츠맨과 현금 동원력으로 유명한 레드 애플 그룹의 존 캐스마티디가 트럼프를 초청했다. 맨해튼의 돈줄을 쥐고 있다는 설탕회사 도미노의 소유주인 억만장자 페페 판줄이 트럼프 정치 자금 모금에 발 벗고 나섰다. 트럼프는 맨해튼 재판 유죄평결 이후 첫 공개 유세를 서부지역 경합주의 핵심인 애리조나에서 했다. 43도를 넘는 살인적인 찜통더위에도 수천명의 지지자들이 열광했다. 부상자가 나와 긴급 앰뷸런스가 동원되고 생수를 나눠주며 지지자들을 진정시키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2016년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만들고 백악관까지 따라 들어가 브레인 역할을 했던 극우 전략가인 스티브 배넌 전 백악관 수석 전략가가 트럼프 유죄 평결에 시간을 맞춰 수천 명의 극우 팝캐스터들을 동원했다. 배넌은 2019년 백악관을 나온 뒤부터 워싱턴 연방의사당에서 두 블럭 거리의 낡은 주택 지하실에 상황실(War Room)을 만들었다. 그곳에서 그는 유튜브 방송을 운영하는 데 거의 6백만 명의 시청자를 갖고 있다. 그는 연방하원 내부의 ‘마가(MAGA·미국을 위대하게) 전사’(트럼프 전사) 의원들을 조직했다. 현직 극우파 의원들을 방송에 출연시켜 지지자들로부터 한 번에 수십만 달러를 모금해주는 미끼를 마다할 의원이 없다. 트럼프로부터 독립하려던 공화당의 2인자 캐빈 매카시를 하원의장에서 쫓아낸 장본인이 배넌이다. 그의 이 유튜브 방송에 단골로 출연하는 극우파 현직 하원의원들이 배넌의 조정을 받아 매카시를 하원의장 자리에서 축출했다.
배넌은 1.6 의사당 난동사태와 관련한 의회 청문회의 증인 출석과 자료 제출을 거부한 혐의로 형사 기소되어 7월1일부터 감옥에 들어가야 할 처지다. 그는 지금부터 대선 때까지 자신을 가두려는 바이든 세력의 음모라고 떠들고 있다. 자신을 따르는 극우 팝캐스터들을 트럼프에 바싹 붙여주는 역할에 기세를 올리고 있다. 지난 주말 트럼프의 애리조나 유세장에 스티브 배넌은 극우 유튜버들을 총출동시켰다. 트럼프의 문제가 드러날수록 캠페인 동력이 강화되는 일이 새로운 현상은 아니지만, 실정법에서 명확한 범죄자로 평결이 났음에도 이런 상황이 벌어지는 것에 대해 미국 지식인들도 어리둥절해 하고 있다.
트럼프는 2016년 대선 출마를 처음 선언한 이후 전통을 불태우고 규범을 폭파했다. 그의 캠페인엔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낯선 세력이 결집했다. 유권자들은 처음엔 어이없어하다가 나중엔 집단적 호기심으로 흥미롭게 받아넘기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그러다가 유권자의 상당수가 반대편의 이데올로기는 더 나쁘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대선 때마다 선거판에 집중해서 관여하는 활동가들마저도 트럼프를 하나의 선택지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렇게 트럼프의 분열과 파괴와 증오의 정치가 현실이 되었다. 미국 지식인들의 오만과 방심이 힐러리 클린턴을 패배자로 만들었고 그 패배가 시민사회에 쓰나미로 들이닥쳤다.
분열과 파괴로 점철된 트럼프 4년을 청산하고 국가를 정상으로 되돌리겠다며 출범한 조 바이든의 리더쉽은 지금 힐러리의 패배를 다시 떠올리게 한다. 대선 선거전에서 트럼프를 상대하는 바이든 대통령은 강력하고 결단력 있는 리더십을 전혀 보이지 못한다. 바이든 대통령이 무능하고 유약하고 노쇠하고 계산적이고 우유부단하다는 평가가 널리 퍼져있다. 바이든의 유약한 모습이 유권자가 트럼프를 선택지로 고려하게 한다.
트럼프를 막아낼 방도가 민주당 후보를 교체하는 것 말고는 없을까라는 고민이 민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조용히 퍼져나가고 있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1968년 8월 시카고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피의 전당대회’로 불린다)에서 후보 교체 요구가 강력하게 분출했다. 올해 민주당 전당대회도 8월 시카고에서 열린다. 우연이라고만 설명할 수 있을까.
김동석 | 미주한인유권자연대(KAGC)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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