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자 칼럼] 유서 유감(有感)

● 칼럼 2012. 11. 17. 16:23 Posted by SisaHan
지는 낙엽을 바라보며 유서 쓸 생각을 한다. 우린 유서에 대한 고정관념이 있다. 한 많은 세상을 인위적으로 끝맺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남겨 놓는 글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유서가 내포하고 있는 섬뜩함이 있기에 선 뜻 화두에 올리게 되지 않는다. 철인 칸트는 “유서는 가장 불행한 기록이고 또 가장 효력있는 기록이다.” 라고 말했다. 불행하다했음은 그 글이 절대절망의 순간에 쓴 마지막 남긴 글이라는 것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유서를 삶의 정리 차원에서 쓰여 진 글로 간주한다면 불행한 기록이라고 말하기보다는 가장 진실한 자기 고백이요 그러기 때문에 삶의 길벗들을 향한 애정이 가득 담긴 선물이 될 것이란 생각을 해본다. 서로 마음을 터놓고 이제까지 남에게 이야기 할 수 없는 진실을 전할 매체로서 유서 이상의 효과는 없을 것이다.
뒤에 남아 세상을 더 살다 올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정신적인 유산의 일부라 생각한다면 유서가 반드시 끔찍한 기록만은 될 수 없을 것이다. 삶의 결정체는 어디에 가치관을 두고 살아왔느냐에 따라 결정되겠지만 적어도 삶의 씨앗들이 다른 사람의 마음 밭에 심겨져 싹이 틀 수 있다면 그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일까. 일생을 통해 삶의 참의미를 한마디로 답을 내리기란 어렵다. 모를 일들이 알면 알수록 점점 많아진다. 때에 따라서는 객기도 부려보며 자신을 마음 것 풀어주고 싶을 때도 있다. 긴장에서 해방되고 싶고 유유낙낙 유랑도 해보고 싶다. 그러다 인생이 너무 고단하면 삶이 참 지루하단 생각도 해본다. 유서 쓸 마음이 생겼으면 삶이 지치기 시작했다는 암시가 들어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때때로 찾아드는 유서에 대한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흐트러진 삶을 재정비시켜준다.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정체성에 대한 호된 평가를 스스로 내리기도 한다. 꼬박 꼬박 유서라 생각하고 한 자 한 자 글자로 박아낸다. 마치 헝클어진 실타래를 풀어 한 올 한 올 털장갑을 짜듯 말이다. 
사람이 일생을 통하여 가장 행복한 순간은 자기 책임을 다한 뒤에 오는 성취감일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성취감은 성취욕과는 다르다. 성취하겠다는 욕심에서가 아니라 주어진 일에 대한 책임을 다한 결과로 얻어지는 축복이다. 책임감은 용기가 사그라질 때 용기를 주며 믿음이 무너지려 할 때 믿음을 심어주고 희망이 허무하게 느껴질 때 다시 희망을 주는 힘이 된다. 책임감과 함께 꼭 따라야 할 것은 사랑하는 마음가짐이다. 슬기로움이 함께 함이다. 그리하여 마음과 마음의 만남의 소중한 보물을 얻게 되는 기쁨도 있다.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는 베토벤의 개인철학이 담긴 유명한 유서이다. 1801년 베토벤은 의사로부터 청각을 잃을 수도 있다는 얘기와 함께 시골에서 요양할 것을 권유받고 교외의 하일리겐수타트로 갔다. 그곳에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자연과 시골에 애정을 느끼게 되었으나 귓병이 전혀 차도를 보이지 않자 자포자기 상태에 빠졌고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싸였다. 그래서 유서를 쓰고 자신이 죽은 후에 개봉하라는 지시문을 남겼다. 두 명의 동생 앞으로 쓴 장문의 유서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자신의 심경을 솔직히 피력했다. 그는 이곳에 머물면서 그 유명한 [전원교향곡]을 작곡하였다. 베토벤은 짐작컨대 매일을 오늘이 마지막이란 그런 심정으로 살지 않았을까. 그의 사망 뒤에 발표된 유서는 불멸의 음악예술과 함께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다. 
이해인 시인의 ‘미리 쓰는 유서’ 한 연이 마음에 와 닫는다.
누구나 한 번은/ 수의를 준비하는 가을입니다./ 살아 온 날을 고마워하며/ 떠날 차비에 눈을 씻는 계절/ 모두에게 용서를 빌고/ 약속의 땅으로 뛰어가고 싶습니다.

< 민혜기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전 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