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의 순환출자 처리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진 논란을 통해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의 경제민주화 실체가 드러나고 있다. 박 후보가 지난 8일 경제단체장 간담회에서 순환출자 문제와 관련해 “신규 출자는 규제하고 기존 출자분은 자율에 맡긴다”고 밝힌 것이 계기가 됐다. 이를 두고 새누리당 안에서도 재벌에 보호막을 쳐주는, 기존의 재벌 보호정책이란 비판이 일었다.
박 후보 발언은 최근 캠프 내부에서 박 후보에게 보고된 ‘기존 출자분도 의결권을 제한한다’는 내용의 공약 초안을 수용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분명히 한 것이라고 한다. 그의 이런 태도는 최근 경제위기를 강조하면서 경제민주화와 동시에 성장을 추구하는 이른바 ‘투트랙’ 전략을 강조하는 쪽으로 돌아선 것과 맥이 닿아 있다. 대선이 40일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야권 단일화에 맞서 보수층 표를 확보하기 위해 경제민주화에서 한발 빼는 셈이다.
 
경제민주화를 둘러싼 박 후보와 김종인 국민행복추진위원장의 신경전이 위험 수위에 이른 것은 그런 까닭이다. 박 후보는 어제 선대위 회의에서 “기존 순환출자 유지는 내가 경선후보 시절부터 누차 얘기한 것”이라고 거듭 밝혔다. 김 위원장과 결별 가능성까지 염두에 둔 발언이라는 해석이다. 
김 위원장은 “박 후보 주변에 경제민주화를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엄청나게 많다. 주변에 사람이 많으니까 영향력을 끼칠 수 있고, 로비도 있고 하니까…”라며 재계의 로비 가능성까지 언급했다. 김 위원장은 한발 더 나아가 “박 후보가 집토끼 잡는다고 성장 얘기를 자꾸 꺼내면 확장을 못 하고 대선에서 질 수밖에 없다”는 말까지 했다.
 
박 후보가 선거전략상 경제민주화 구호를 뒷전으로 밀어놓는다면 일종의 ‘대국민 사기극’이란 비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박 후보는 대선 출마를 선언하면서 국민 행복을 위한 3개 핵심 과제 중 경제민주화 실현을 첫손가락에 꼽았다. 지난 4월 총선 때도 경제민주화를 핵심 공약으로 내세워 제1당을 차지했다. 이제 와서 경제민주화로 얻을 표는 웬만큼 확보했으니 그만하겠다는 식은 곤란하다. 보수층을 잡기 위해 재벌에 보호막을 쳐준다면, 이제 경제민주화 구호를 대선 슬로건에서 제외하는 게 옳다.
경제민주화를 둘러싼 박 후보의 애매모호한 줄타기는 한두번이 아니다. 과거사 문제를 두고 사과했지만 진정성을 의심받은 것과 마찬가지로 경제민주화도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다 결국은 속 빈 강정이 되어가고 있다. 박 후보는 이제 경제민주화, 즉 재벌개혁을 하겠다는 것인지 말겠다는 것인지, 유권자에게 분명히 말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