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와 같은 소외된 분들을 위해 헌신하고 계시는 목사님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 분의 여러 가지 수고와 그에 따르는 고충을 들으면서 나는 진심에서 우러난 마음으로 참으로 수고가 많으십니다 하고 과찬이 아닌 감사의 말씀을 전했다. 그랬더니 그 목사님이 겸양의 말씀으로 하시는 말씀이 “저는 그저 징검다리로 생각하고 섬깁니다” 하시는 것이 아니겠는가?
징검다리, 징검다리라! 참 오랜 만에 듣는 단어다. 예전에는 참 많이 썼던 단어다. 개울을 건널 수 있도록 사람의 보폭에 맞추어 띄엄띄엄 물속에 박아둔 돌이다. 몇 개씩 이어지면서 다리처럼 건넌다고 징검다리라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오늘에는 웬만하면 다리가 놓여져 실제로 징검다리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예전에는 나루를 건네주던 쪽배도 있었고 작은 개울에는 이 징검다리가 있었는데 요즘은 거의 볼 수가 없는 것이 역사의 흐름인가? 문화의 발전인가? 그렇기 때문에 징검다리처럼 사는 분도 사라지고 그 단어마저 생소하게 들리는지 모르겠다
징검다리로 놓여진 돌은 몸을 물 속에다 박고 그 위로 사람들이 물에 빠지지 않으려 한 발 한 발 그 위를 딛고 지나간다. 진흙이 묻은 신도 있고 예쁜 구두도 있고 신발도 없는 사람이 맨발로 그냥 밟고 지나간다. 개울을 건너면서 징검다리 때문에 잘 지나왔다 또는 징검다리 덕에 물에 안 빠졌네 하고 고마워하면서도 그것으로 끝난다.
징검다리가 고마웠다고 그 돌들을 쓰다듬어 주거나 말뚝을 세워 고맙다 하고 표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냥 밟고 지나가면 그것으로 끝이다. 그러나 징검다리는 누군가 자신을 물 속에 넣어둔 그 모습 그 자리에서 사람들에게, 때로는 개와 같은 짐승들에게도 밟히면서 그냥 그대로 있는 것이다. 어느 누구가 고맙다고 안해도.
사회에 봉사하고 교회를 섬기는 봉사자 헌신자의 삶이 그렇지 않을까? 그들은 자신을 남들이 들여놓기 싫어하는 물과 같은 험한 곳에 자신을 들여놓고 남이 자신을 밟고 지나가고 자신을 이용해서 출세를 한다고 해도 그는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밟히는 삶이 어디 쉬우랴? 그 목사님이 징검다리라는 단어를 말씀하실 때, 왜 나는 엔도 슈샤꾸가 쓴 ‘침묵’ 이란 소설이 생각이 날까?
고문을 견디다 못한 로드리고 신부는 후미에(예수님의 얼굴이 새겨진 동판)을 밟으려 할 때 하도 많이 밟아 이미 찌그러진 그 예수님의 얼굴. 그때 예수님이 그에게 하시는 말씀. “밟아라 밟아라. 나를 밟고 지나가라. 나는 원래 너희들에게 밟히기 위해 이 땅에 왔느니라.” 이 말씀을 읽을 때 코가 찡하고 왜 눈물이 흐를까?
예수님은 스스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밟히러 오셨다고 하셨는데 우리는 어떤가? 예수님이 밟히심을 당당히 말씀하실 때 감격스러워서 그럴까? 아니면 그러지 못하는 우리가 부끄러워서 눈물이 흐를까? 그 예수를 믿는다는 우리는 밟히려 하지 않고 오히려 남을 밟고 그를 딛고 일어서고 그 위에 내 집을 세우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러니 징검다리는커녕 예수의 정신은 저 멀리 가버리고 없는 것이다.
교회를 본다. 세상을 본다. 징검다리처럼 봄 여름 겨울 할 것 없이 언제나 자신을 물 속에 담그고 어떤 발로 밟고 지나가든 묵묵히 그 시간을 지나는 징검다리. 참으로 고맙다. 또한 그렇게 사시는 분들이 참으로 고맙다.
< 김경진 - 토론토 빌라델비아 장로교회 담임목사 >
< 김경진 - 토론토 빌라델비아 장로교회 담임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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