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영방송을 장악하여 입맛대로 주무르려는 청와대와 권력의 꼭두각시 노릇을 자청하는 하수인들에 대한 분노가 봇물처럼 터져 나오고 있다. <한국방송>(KBS)에선 기자에 이어 피디들까지 사장 퇴진을 외치고 나섰고, 정부의 언론통제에 대한 학계, 언론계의 비판성명이 잇따르고 있다.
공영방송을 장악하려는 정권의 시도는 알다시피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명박 정권 때 부활한 언론통제의 악습은 김인규(KBS)-김재철(MBC)-길환영(KBS) 등 ‘걸출한’ 어용사장의 계보를 통해 이어졌고, 그 결과 2014년 한국의 언론자유 순위는 세계 68위로 곤두박질쳤다.
박근혜 정부의 시대착오적 언론통제는 마땅히 저지돼야 한다. 그러나 이는 공영방송 정상화의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사실도 유념해야 한다. 문제는 길환영 사장의 퇴진을 넘어, 이명박 정부가 짓밟고 박근혜 정권이 숨통을 끊어놓은 공영방송의 공론장을 되살리는 것이다. 공영방송은 이제 이름에 걸맞은 공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환골탈태해야 한다.
사실 정권의 방송 장악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보수 기득권 세력이 수면 아래에서 줄기차게 추진해온 우민화 책략이다. 민영방송은 말할 것도 없고, 공영방송마저 국민을 바보로 만드는 일에 용의주도하게 동원되고 있다.
공영방송의 현실을 보라. 그곳은 개그맨, 연예인, 스포츠맨의 영토이지, 다른 나라, 예컨대 독일의 경우처럼, 예술가, 학자, 정치인의 영역이 아니다.
그곳은 연예인의 사생활 잡담, 개그맨의 객쩍은 수다, 막장 드라마의 악취, 휴먼다큐의 값싼 감상주의, 건강에 대한 끝없는 협박, 맛있는 곳과 놀러 갈 곳에 대한 유혹으로 가득하지만, 어디에서도 우리 사회가 다다른 참담한 현실과 국가가 처한 냉엄한 상황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고민은 찾아볼 수 없다.
그곳은 정치적인 것, 사회적인 것이 완전히 소거된 탈역사의 공간이다. 세계와 사회를 인식하고, 역사와 시대를 성찰하는 지성의 공간은 오늘날 한국 텔레비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공영방송이 이처럼 사회적 비참은 철저히 외면한 채 거짓 행복의 가상을 매일매일 안방에 실어 나를 때, 그것이 대중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정치적 사안에 대한 왜곡보도보다 훨씬 더 치명적이다. 보도 조작은 단면적이고 주기적임에 반해, 우민화는 전면적이고 일상적이며, 왜곡보도는 목적의식적으로 이루어짐에 반해, 우민화는 부지불식간에 무의식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공영방송이 수행하는 이런 전면적 우민화는 본능적으로 이성적 토론을 기피하는 -“말 많으면 공산당”이라고 하지 않는가- 한국 보수의 뿌리 깊은 지적 열등감과 반지성주의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국민을 무지상태에 묶어두어야 정치적으로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묘한 패배주의가 보수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권력만 잡으면 빗장을 걸어 공론장을 폐쇄시킨다. 왜 그들은 열린 공론장을 두려워하는가? 왜 그들은 자유로운 공론장에서 갈등과 대립을 넘어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가?
방송의 민주화를 쟁취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방송의 우민화를 저지하는 것은 더 중요하다. 정권의 방송 장악은 공정한 보도를 망치지만, 방송의 총체적 오락화는 대중의 의식을 잠재운다.
우리는 편안한 자세로 소파에 기댄 채 오락물의 부드러운 유혹에 굴복하여 날마다 탈정치화된다. 그리하여 사회적 비참은 도처에서 창궐하는데도, 사회변혁을 위한 물적 제도적 조건은 이미 갖춰졌음에도, 사회변혁의 실천은 부재한 부조리한 현실이 지속되는 것이다.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 분출되지 못하는 것이다.
< 김누리 중앙대 독문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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