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과 소망] 얼굴

● 교회소식 2014. 7. 21. 19:56 Posted by SisaHan
지난 주에 함께 몬트리올의 감리교회와 함께 원주민 선교사역을 하고 왔다. 그런데 그 중에 몇 분들은 얼굴만 서로 보고 가볍게 인사만 하고 별 대화를 나누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 오신지 얼마 안되셨겠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는데 정말 마음의 판단 그대로였다. 
종종 오랜 이민생활 속에서 이민자의 깊은 시름과 애환이 담겨있는 얼굴을 보면서 오랫동안 캐나다에서 생활하신 분이시겠구나 하는 판단이 드는 분들도 만나기도 한다. 미술 평론가 박영택은 그의 책 ‘얼굴이 말하다’에서 사람의 얼굴을 이렇게 정의한다. “얼굴은 문자로 쓰이지 않은 역사책”, “사람의 얼굴 속에는 그가 살아온 삶의 이력과 상처들로 만들어진 숲이다”. 그래서 얼굴은 보는 것이 아니라 읽는 것이다 라고 말한다. 
소위 성형 천국이라는 한국에서는 보여지는 얼굴을 위해서 예쁘고 잘생기게 고치려고 하시만, 사실은 내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내 삶을 지우고 부정하는 행위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브라함 링컨이 말한 대로 자신의 얼굴에 대하여 스스로가 책임을 지라는 것을, 우리는 성형외과 의사에게 맡기는 시대에 살고 있다. 

성경에도 사람의 얼굴과 연관된 사건이나 언급들을 자주 찾아볼 수 있다. 
창세기 47장에 보면 야곱이 이집트 제국의 황제 파라오를 만났을 때 황제가 문득 야곱의 나이를 묻는다. 아마도 야곱의 파란만장 삶의 흔적과 기록되지 않았지만 읽을 수 있는 삶의 역사를 그의 얼굴에서 보았기에 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야곱에게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만큼에 비례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에 황제를 축복하면서 황실에서 나온다. 야곱의 얼굴에 담긴, 다른 사람들에게 읽혀지는 한 사람의 역사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은혜를 가지고 황제를 두 번씩이나 축복한다고 성경은 소개하고 있다. 
출애굽기 34장에 모세가 호렙산에서 40일 동안 하나님과 얼굴을 마주보고 있다가 산 아래로 내려오니 그의 얼굴이 너무 빛나 백성들 앞에서 얼굴을 가릴 수 밖에 없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여러 해석이 가능한 본문이지만 하나님과 진정한 교제와 함께하심 속에서 얼굴의 변화를 소개하고 있다. 
사도행전 6장에도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인간적으로는 비참한 최후이지만 그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더라’ 소개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이 충만한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와 같았더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흔히 쓰는 말대로 들어가는 것(input)이 있으니 나오는 것(output)이 있듯이 죽음의 자리에서도 평소 스데반이 안으로 담고 있는 것이 표출된 모습이 그의 얼굴은 천사와 같았더라고 한 것이었다. 

히브리어로 얼굴이라는 단어, 페넴(feneym)은 복수로 쓰인다고 한다. 사람의 얼굴은 한 얼굴일 수 없다. 한 사람의 얼굴 모습에는 주변 환경과 사람들로 인하여 다양한 얼굴로 드러날 수 있다. 신앙인에게는 내 처지와 형편에 따라 얼굴이 바뀌는 나를 도우실 수 있는 하나님이 있다. 부모의 얼굴이 아이의 처지와 형편을 따라 바뀌듯이 신앙인의 얼굴에는 스스로만 써가는 얼굴이 아닌 또 다른 얼굴의 역사가 있다. 하늘의 은혜로 써 가는 얼굴의 역사, 내 모습이고 싶다.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시편 42: 5, 개역한글판) 

< 김주엽 목사 - 토론토 강림교회 담임목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