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십상시와 찌라시 개념

● 칼럼 2014. 12. 16. 20:36 Posted by SisaHan

조선의 임금 연산군은 악행과 음행으로 소문난 군주였다. 어머니로 인해 일찍부터 한을 품었던 그는 왕위에 오르자 천성적으로 좋아한 술과 여자를 탐닉하느라 국정과 백성의 삶은 갈수록 피폐해졌다. 궁중에 수많은 궁녀를 두었음에도 기생은 물론 평민여성들과 조정의 부인들, 심지어 친족인 큰아버지 월산대군의 부인까지도 욕보여 자결케 했다. 반반한 아내를 둔 ‘어이없는 죄’로 아내를 임금에게 뻬앗긴 남편들의 억울한 목이 수없이 날아갔다.
학문의 전당인 성균관을 놀이터로 만들고, 유생들은 모두 쫓아내거나 죽였으며, 주색을 즐기기 위한 토목공사들로 국고가 탕진되었다. 참다못해 폭정을 시정하라 간하는 신하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처단하였으니 충신은 목숨을 부지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면서 조정의 대신들에게 “입은 재앙을 초래하는 문이요, 혀는 몸을 죽이는 도끼이다”라고 쓴 패를 차게 하여 충언을 하려거든 재앙과 도끼를 각오하라고 협박, 주변에선 올곧게 입을 여는 사람의 씨가 말라 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그때 일개 내관, 즉 내시였던 김처선이라는 사람이 보다 보다못해 목숨을 걸고 나선다. 김처선은 도끼날이 번득이는 살벌한 왕명을 어기면서 연산에게 ‘제발 처신을 바로 하소서’라고 충직하게 간언을 했으니, 그의 용기와 충성심은 역사에 기록되고도 남을 만했다. 그는 각오한대로 연산이 직접 쏜 화살에 맞아 참혹하게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그의 집터는 파헤쳐져 연못이 되었고 아무 죄없는 친척들에게까지 화가 미쳤다.
당시 김처선이라는 충신 환관을 어리석다며 비웃듯 극명하게 대조적인 김자원이라는 내시가 있었으니, 그는 조선시대 가장 악랄한 내시로 역시 사초에 이름을 남겼다. 폭군의 비위를 맞추며 권세를 휘두른 김자원이란 자의 위세는, 조정의 모든 관료들이 그를 통하지 않고는 왕을 알현할 수 없을 만큼 막강했다. 그가 승정원에 출입할 때는 일개 내시 신분임에도 모든 승지가 머리를 숙여야 했고, 그가 행차하는 곳에서는 아무리 고관대작에 양반이라 해도 말에서 내려야 했다. 김자원이 이렇게 행세할 수 있었던 것은 절대궐력자 연산을 업은 호가호위(狐假虎威)였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왕명의 출납을 악용한 오만방자요 행패였다. 그를 수족삼아 무능한 군주 연산군은 자신의 부도덕과 악행을 감추고 최대한 활용하는 ‘악어와 악어새’의 공생이었던 것이다.


최근 정윤회 국정개입 파문을 빚은 청와대 유출문건에 ‘십상시’(十常侍)라는 말이 거론돼 사람들 입에 회자되고 있다. 중국 후한 말 영제(靈帝, 156~189)때 환관 10명이 어리고 물정에 어두운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들고는 권력을 휘두르며 국정을 농단한 사건에서 유래한 10명의 내시, 곧 ‘중국판 김자원’들을 일컫는 말이다. 중국의 ‘후한서’(後漢書)와 나관중의 역사소설 ‘삼국지’(三國志演義)에 나오는 이들 삽상시는 그러나 일장춘몽의 권력 꿀맛을 본 뒤, 차례로 모조리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물론 그들이 지탱했던 나라도 허망하게 무너져 내렸음은 당연한 섭리다.
21세기 민주주의 나라 대한민국에서 2천년 전 중국 땅에 설쳐댔던 환관들의 이야기가 되살아나는 현상은 무얼 말해주는가. 유출문서를 ‘하찮은 찌라시’라며 스스로 국가 최고 권부인 청와대를 ‘찌라시 제작소’로 추락시켜 버린 이가 바로 청와대 주인이다. 자신의 국정리더쉽이 얼마나 허술하고 미숙했으면, 최측근 비서관들이 십상시에 비유된 문서를 가까운 청와대 고위직들이 만들어 보고했겠는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한 듯하다. 본질은 외면한 채 ‘찌라시’라고 반박하며 검찰에 ‘찌라시’임을 증명하라고 수사엄명을 내리는 스스로의 모순과 무개념이 새삼 놀라울 뿐이다.


십상시를 지적한 유출문서가 ‘근거 있는’ 찌라시로 끝날 가능성은 거의 없는 듯하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십상시의 소문은 이미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수사와는 상관없이 사람들 머리에 실감나게 각인되고 말았다. 그것은 떠돌던 풍설들이 문자화까지 된 현실, 그동안 여러 정황들로 볼 때 상당한 심증을 주어온 현실, 그리고 문체부와 승마협회, 군 인사 등을 둘러싼 근래의 이상한 징벌적 조치와 살생부 운운 등이 그 심증에 부가자료를 제공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현 정권은 앞으로도 3년이 남았다. 지난 2년도 온갖 잡음들로 허송하며 국민들이 시달린 마당에, 국내외적으로 중차대한 시기, 남은 세월마저 후회와 탄식만 쌓아갈 국정은 제발 그치고 바로잡아야 한다. ‘십상시’와 ‘문고리권력’이 뭘 의미하는지 깊이 성찰하고 당장 리더쉽을 쇄신하지 않으면 안된다. 차제에, 아무리 지적해도 무슨 말이냐 이해가 안된다면, 차라리 포기하고 내려오는 게 국민과 나라를 위한 일이다.


< 김종천 편집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