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자 칼럼] 십이월의 두 그림자

● 칼럼 2014. 12. 16. 20:39 Posted by SisaHan

저녁 외출을 하다가 크리스마스 장식을 거창하게 한 동네를 지났다. 집집마다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더 화려하게, 더 크게, 더 개성 있게 한껏 멋을 낸 조형물과 트리들이 저마다 빛을 발하며 눈길을 앗아갔다. 좌우로 고개를 열심히 돌리며 크리스마스트리 터널을 지나는 동안 어딘가에 박혀있던 나의 동심이 꿈틀거리며 시샘 아닌 시샘을 한다. ‘저런 것들을 보고 자라는 요즈음 아이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나는 꿈도 꾸어본 적 없는데.’ 하고.
해마다 12월에 접어들면 내 마음을 은근히 짓누르는 일이 하나 있다. 남들은 즐기면서 하는 크리스마스 장식이 나에게는 큰 숙제로 다가오는 탓이다. 그것을 꼭 설치해야만 될까.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지만 쉽게 결론이 나지 않는다. 실내 장식이야 기분 내키는 대로 하면 그만이지만 뭇 시선이 오가는 밖은 나름 신경을 좀 써야 하는 게 아닌가. 이웃과 더불어 살면서 기울어지지 않을 정도의 보조는 맞추어야 하련만 차일피일 미루다 보면 번번이 시기를 놓치기 일쑤다.


올해도 어김없이 갈등 속에 있다가 용기를 내서 전지가위를 들었다. 집 모퉁이에 서 있는 호랑이 발톱나무 가지를 가시에 찔려가며 한 아름 잘랐다. 그리곤 일 년 내내 차고 구석에 있던 항아리와 자작나무 둥치를 꺼내어 가지들을 수북이 꽂았다. 하얀 자작나무 지주에 파란 잎과 빨간 열매가 조화를 이루어 제법 분위기가 났다. 내친김에 조금 더 욕심을 내려다가 주춤했다. 초자 실력으론 감당이 안 될 만큼 화려한 이웃집의 작품들이 눈에 밟혀 무리수를 둘 수가 없었다.
처음 이곳에 정착했을 때 가장 부러웠던 것 중의 하나가 할로윈이나 크리스마스 같은 축제일을 즐기는 모습이었다.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함께 꾸미고 즐기는 어른들의 여유가 생경하면서도 아름다웠다. 세상 모든 아이들의 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월트 디즈니의 ‘미키마우스’나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혹은 ‘해리포터’ 같은 캐릭터들은, 작가의 이런 생활방식이 밑바탕 되어 탄생하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하면서도 쉽게 그 쪽으로 접근이 안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크리스마스 장식은커녕 크리스마스 선물도 받아보지 못하고 자란 세대이기에 이 시즌에 갖는 부담감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크리스마스의 본질에서 많이 어긋나 있는 작금의 시류에 편성하기보다 내 방식대로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며 한 해를 마무리해야겠다.
12월도 중반을 향하고 있는 지금, 무사히 한 해를 살아 낸 뿌듯함과 동시에 또 한 해를 떠나보내야 하는 허전함이 교차한다. 해마다 이맘때면 느끼는 기분이지만 어쩔 수 없다. 얼마 남지 않은 올해의 마지막을 어떻게 마무리 할까 하다가 아이의 전자 메일이 생각났다.
며칠 전 객지에 나가 있는 큰 아들에게서 가슴 찡한 소식이 왔다. 집안의 대소사에 참여하지 못하는 아쉬움과 함께 내년엔 온가족이 모두 모여 행복하게 살자는 희망 메시지 끝에 진심어린 한 문장이 내내 가슴을 얼얼하게 했다.
‘아버지 어머니가 많이 그립습니다.’ 아이의 힘겨운 타지 생활이 그대로 느껴져 잠시 눈시울을 적시긴 했지만 정감어린 그립다는 표현이 그렇게 신선할 수 없었다. 가까운 사람끼리 이심전심도 좋지만 표현에도 게으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 그립습니다.
 친구야 보고 싶다.
 여보, 사랑해요.
 
갈수록 사용 빈도가 줄어드는 이 아름다운 말들이 다시 생기를 찾을 수 있도록 얼마 남지 않은 올해 많이 애용 할 참이다.

< 임순숙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에세이스트’로 등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