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나를 어루만져준 두 젊음

● 칼럼 2014. 12. 16. 20:31 Posted by SisaHan

죽음이 이렇게 내 곁으로 숱하게 지나간 해는 없었던 것 같다. 연초에 동갑내기 둘이 세상을 뜨더니 봄에는 세월호에서 여리디여린 학생 수백명의 참혹한 죽음을 몸이 저며지는 듯한 고통 속에서 보아야 했다. 가을 들어 선배 후배 친지 학자 시인 등 인생에 깊은 울림을 주었던 사람들을 줄줄이 떠나보냈다. 죽음을 많이 볼 나이가 되었구나 싶었지만 죽음이 나이순이었던 것도 아니어서 황망함 또한 커져갔다.
아침 산책길에 청운동 자치회관 앞에서 세월호에서 진 어린 학생들의 사진이 찬바람에 흔들린다. 그 사이로 방긋이 웃고 있는 얼굴들을 눈에 익혀두고 싶어 찬찬히 들여다본다. 어찌 저리 여리고 해맑은 아이들을. 하늘도 무심하시지라는 탄식을 매번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 세상 또한 그들을 잊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절망 때문에 지금 우리 사회의 값싸고 너절하기 짝이 없는 권력싸움과 세상살이의 모진 사연들이 허망하기도 해서 하루하루가,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다가올 한해가, 두렵기만 했다.
그런데 젊고 따뜻한 두 남녀를 만났다. 이런 사람들과 같이 사는 세상이라면…. 그들은 황폐한 내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었다.


영화 <쿼바디스>를 보고 나오는데 젊은 여자가 쫓아왔다. 머뭇머뭇하며 다가온 여자는 추운 겨울 칼바람 속에 서 있는 성냥팔이 소녀처럼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 눈빛이 너무 간절해서 무슨 일이냐 물었더니 “혹시 교회 다니셔요?”라고 아주 작은 소리로 물었다. 대형 교회와 장사꾼 목사들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토해내고 있는 영화를 보고 나서도 전도할 생각이 날까라는 생각이 스쳐 안 다닌다고 단호하게 말했더니 쭈뼛쭈뼛하며 더욱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작은 교회로 나오셔요 대형 교회만 그래요 작은 교회로 오면 돼요……, 여자는 울먹거렸다. 영화를 보고 아마 영혼이 통째로 뒤집어졌을 젊은 여자는 그래도 저건 하나님과 예수님과 상관없는 교회와 목사들의 이야기일 뿐이라고 민망함과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말하는 거니까 들어달라고 간절한 눈길로 호소하고 있었다.
그 여자의 눈길 때문에, 그 간절하고 슬픈 눈길 때문에, 만약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앞을 혼자 지나가야 하는 절대적 순간이 올 때 그 눈빛을 기억하고 존재의 소멸보다 따뜻한 빛 같은 것을 느낄 수도 있겠다 싶었다.
또 다른 젊은이, 그는 스물다섯살의 신학생이다. 다큐멘터리 영화 <목숨>은 호스피스센터에서 마지막을 준비하는 이들의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가족과 본인의 허락을 얻어 찍은 말 그대로 가감 없는 현실이었다.


신학생은 속세에서 어떤 상처를 받았다고 했고 그래서 휴학을 하고 호스피스 병동에 들어온다.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들과 함께 살며 기타 치고 노래 부르고 곳곳에서 유쾌한 바이러스를 전파한다. 외로운 사람과 말벗도 해주고 마술을 가르치기도 하고 간간이 막걸리도 나누어 마시면서 평균 21일 정도의 시간밖에 안 남은 사람들에게 행복한 순간을 마련해주고 웃음을 이끌어낸다. 그는 말한다. 나는 신앙에 대한 회의가 없다. 확신도 없었으니까. 그런데 호스피스 병동에서 지내면서 보잘것없는 자신에게 신뢰를 보내고 착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들이 살았을 속세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겠다는 마음을 굳힌다.
몇몇 돌보던 이들이 죽은 다음에 그는 호스피스 병동을 나온다. 신발끈을 조여매고 배낭 하나 메고 다시 저 속세의 모두 죽을 날을 받아놓은 거나 다름없는 인간들과 다시 부딪쳐 보자고 다짐한다. 그가 다시 신학교에 돌아갔는지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온갖 장식과 불빛으로 예수님 오신 날을 한달 내내 기리는 도시의 풍경 속에서 우연히 만난 두 젊음으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생각한다.
2000년 전의 예수가 아닌, 바로 지금 여기 이 땅에서 같이 사는 누군가가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고야 마는 그 진정한 마음이 예수의 의미이고 그것이야말로 기적이 아닌가 싶다는 생각을 한다.
< 김선주 - 언론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