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진보당을 해산하고 소속 국회의원 전원의 직을 박탈한 헌법재판소의 결정문은 A4로 347쪽 분량이다. 여기서 재판관 한 명이 쓴 반대의견 180쪽과 이를 반박한 다른 재판관 두 명의 보충의견 20쪽을 제외하면 이번 결정의 근거가 되는 재판관 여덟 명의 법정의견은 147쪽이다. 이는 다시 정당 해산 관련 144.5쪽, 국회의원직 박탈 관련 2.5쪽으로 나뉜다.
이 결정문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헌재 스스로 “헌법이나 법률에 명문의 규정이 없다”고 하고서도 의원직 박탈을 정당화한 이 2.5쪽이다. 200자 원고지로 10장 남짓한 이 대목은 그 분량만으로도 재판관 8명의 지적 수준과 논리 전개력을 여실히 보여준다.
여기서 국민이 선출한 입법부의 의원직을 사법기관인 헌재가 박탈할 수 있는가라는, 민주주의의 원리를 둘러싼 깊은 성찰 같은 것은 발견할 수 없다. 당을 없애기로 한 마당에 의원직을 남겨 놓아서는 정당 해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는, 그러니 의원직까지 함께 박탈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조야한 주장이 있을 뿐이다.
철학의 빈곤만이 아니다. 이 2.5쪽은 헌재가 헌법과 법률에 규정이 없는 사안에 대해서는 헌법의 이름을 빌려 임의의 결정을 하겠다는 ‘재판관 입법’ 선언으로 읽힌다.
기실 헌재의 ‘월권’은 뉴스가 아니다. 헌재는 1988년 창설 직후부터 ‘변형결정’이라는 이름으로 헌법불합치, 한정위헌, 한정합헌을 선고하고 있다. 그러나 그 근거는 헌법재판소법 어디에도 없다. 그 법에는 “법률 또는 법률 조항의 위헌 여부만을 결정한다”(제45조), “위헌으로 결정된 법률 또는 법률의 조항은 그 결정이 있는 날부터 효력을 상실한다”(제47조 2항)고 돼 있을 뿐이다. 헌재는 위헌이나 합헌 중 하나만 선고하라는 뜻이다. 그런데 헌재는 45조를 무시하는 동시에 47조 2항의 적용을 중지시키는 방식으로 법에 없는 변형결정을 27년째 계속해오고 있다.
변형결정은 종종 단순 위헌 심사를 넘어 입법권을 침해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가장 가까운 예로 지난해 10월 국회의원 선거구별 인구 편차를 현행 3 대 1에서 2 대 1로 줄이고, 이를 반영한 법 개정을 2015년 말까지 완료하라고 한 헌법불합치 결정은 국회가 논의하고 결정해야 할 대체 입법의 원칙과 시한까지 제시했다. 결국 선출된 -‘민주적 정당성’이 있는- 권력인 국회를 선출되지 않은 -민주적 정당성이 없는- 권력인 헌재의 명령 수행자로 만들어 삼권분립의 근간을 흔들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국회는 헌재의 ‘습관적 월권’을 방임해왔다. 변형결정의 위법성을 입법으로라도 해소하려는 시도는 없었다. 오히려 스스로 해결해야 할 난제들을 헌재로 들고 가는 이른바 ‘정치의 사법화’를 통해 헌재의 권능만 강화시켜줬다. 재판관 후보자 인사 청문 과정에서는 도덕적 흠결을 찾는 데 매몰돼 자질과 능력의 검증은 소홀히 넘기기가 다반사였다.
학자들과 언론도 입맛 따라 ‘사법적극주의’라는 평가와 ‘사법자제’ 요구 사이를 오락가락했다. 헌재의 월권을 지적하는 목소리는 너무 작아 무시되었다. 먹고살기 바쁜 일반 국민에게 헌재는 법원•검찰과 달리 한참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다. 헌법에도 법률에도 없는 의원직 박탈 결정은 어느 날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다. 헌재의 월권은 법률의 위헌 여부를 심사하는 독점적 권한을 부여받은 그 순간부터 시작된 것일 수 있다.
예전엔 “판사가 헌법이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헌법이다”(찰스 휴스 전 미국 연방대법원장), “연방대법원이 곧 헌법이다”(펠릭스 프랭크퍼터 미 연방대법관)라는 등속의 호언이 그저 남의 얘기처럼 들렸다. 그런 말들에 ‘재판관 9인의 과두지배’라는 비판이 제기돼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 강희철 - 한겨레신문 사회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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