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들이 한번은 가보길 소망하는 이스라엘 예루살렘은 성지의 평화보다는 38선 못지않은 긴장감이 넘친다. 2천년 전 로마에 나라를 잃고 떠난 유대인들이 1948년 돌아와 이스라엘을 세우면서 이 땅은 성스럽기보다는 성난 땅이 됐다. 1500여년간 이곳에 살던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에 의해 궁지에 몰린 끝에 분리장벽에 갇힌 신세로 전락했다.
9년 전 기독교와 유대교, 이슬람 3대 종교 성지가 집중돼 있는 동예루살렘을 순례했다. 팔레스타인인 집단거주지인 아랍구역에서 팔레스타인 소년의 손에 뭔가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쇠못이었다. 소년은 우리 일행을 향해 그 못을 찌르는 시늉을 했다. 이스라엘 무장 군인이 본다면? 외신을 통해 팔레스타인 아이들에게 조준사격하는 이스라엘군을 봤기에 나도 모르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중무장한 이스라엘 군인들은 지나가고 없었다.
예수가 십자가형을 선고받고 숨져 묻힌 곳까지 14개의 지점을 순례하는 ‘비아 돌로로사’(슬픔의 길)는 상인들과 순례객들로 발 디딜 틈 없는 시장통이다. 그 북새통에서 일행을 놓치고 서둘러 인파 속을 헤치고 나갈 때였다. 한 팔레스타인 청년이 내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그 순간 테러의 공포가 엄습했다. 실제 그 직후 한 한국인 특파원이 팔레스타인 무장단체에 인질로 잡혔다. 우여곡절 끝에 골고다언덕에서 일행들과 재회하자 마치 사지에서 벗어난 기분이었다.
나처럼 직접적인 위협을 경험하지 않는 이들도 이제 무슬림들에 대한 경계심을 당연시한다. 프랑스의 <샤를리 에브도> 테러로 전세계 매스컴에 의해 ‘무슬림=테러’란 이미지는 더 선명해지고 있다. ‘무슬림공포증’으로 ‘무슬림들이 왜 그러는지’에 대한 질문은 사라진다. 나 또한 무슬림 청년에 의한 주먹질에만 압도될 당시엔, 이슬라엘과 한 몸인 양 행동하는 미국의 우산 아래서 남의 땅을 제 안방인 양 휘젓고 다니며 자존심에 상처를 낸 한국인의 자화상을 볼 수 없었다.
서방을 등에 업은 이스라엘인 가운데서도 역지사지하는 인물이 있다. 세계적인 지휘자인 다니엘 바렌보임이다. 그는 이스라엘이 노벨상에 버금가는 상으로 제정한 울프상을 2004년 수상하면서 “남(팔레스타인)의 땅을 점령하고 그들을 지배하는 것이 (이스라엘) 독립 정신이냐?”고 물었다.
바렌보임을 깨운 것은 예루살렘 출신의 팔레스타인인 에드워드 사이드 하버드대 교수였다. <오리엔탈리즘>의 저자로 유명한 사이드는 “동양(오리엔탈)의 이미지란 동양을 약탈 대상으로 여기며 인종차별 의식을 지닌 서구인들의 편견과 왜곡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렇다. 샤를리는 전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당했지만, 무슬림들은 아무도 모르게 지속적으로 당해왔다. 그러면서도 피해자들이 아니라 공격자와 테러범이란 이미지가 더욱 부각되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잔혹한 무슬림 근본주의자들의 보복 테러와 살상에 동의할 수는 없다. 어떤 테러도 반대하고 혐오한다.
하지만 그 테러를 계기로 무슬림 근본주의자들을 격리시킨다면서 결국은 대다수 무슬림들을 더 높은 분리장벽 안에 가두려는 서구의 집단의식도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왕따의 분리장벽은 근본주의자들과 다수 무슬림들을 하나로 단결시켜줄 뿐이다.
2001년엔 샤를리 테러보다 더한 무슬림 극단주의자들의 9.11테러가 있었다. 당시 미국인들이 무슬림들을 다 때려죽일 듯 증오감에 치를 떨 때 전혀 다른 행동을 취한 이들이 있었다. 기독교 종파 미국퀘이커봉사위원회였다. 그들은 무슬림들을 초청해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물었다.
이제 샤를리도 무슬림들도 더 이상 죽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표현의 자유란 이름으로 불난 집에 기름을 붓기 전에 먼저 이렇게 물어야 한다.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는가.”
그리고 우리가 핍박하거나 그에 동조함으로써 상처 입은 이들에게 용서를 청해야 한다. 강자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약자들의 예언자를 조롱하는 것만이 아니다. 관용과 포용으로 평화를 만들어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강자만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이다.
< 한겨레신문 조현 논설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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