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대통령은 그때 왜?

● 칼럼 2015. 2. 15. 14:42 Posted by SisaHan

“아직도 최저임금 인상에 반대하는 의원들께 이런 말을 하고 싶네요. 풀타임으로 일하고도 한해 1만5000달러(약 1600만원)도 안 되는 돈으로 가족을 부양할 수 있다고 진짜로 믿는다면, 당신이 그 돈으로 한번 살아보시라고. 그게 아니라면, 미국에서 가장 열심히 일하는 수백만 노동자의 임금을 올리는 데 찬성표를 던져주세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1월20일 새해 국정연설에서 시간당 최저임금을 10달러10센트(1만1000원)로 올리자며 한 말이다. 오바마는 “우리한테 필요한 건 ‘일하는 미국인’들을 실제로 도울 세금정책”이라며 ‘상위 1% 부자 증세’와 최저임금 인상을 거듭 호소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새해 기자회견이나 부처별 업무보고에서 이런 ‘아름다운 연설’을 하리라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말을 하리라고도 예상하지 못했다. “우리나라에만 있는 이상한 법들이 많이 있는데 ‘떼법’이라는 것도 있고, 이런 게 없어져야 ‘짠’ 하고 선진 대한민국으로 탄생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박 대통령이 1월22일 교육부·고용노동부·보건복지부·여성가족부·환경부•문화체육관광부 합동 업무보고를 들은 뒤 한 종결발언의 일부다. 청소년은 자살하고(10대 자살률 세계 1위), 청년들은 ‘4포 세대’(취업·연애·결혼·출산 포기)라 불리고, 40~50대 가장들은 일자리를 잃고 거리로 쏟아져나오고, 늙을수록 가난해지는 이상한 나라. 그런데 대통령은 ‘떼법’만 없애면 ‘선진 대한민국’이 탄생한단다. 검사와 경찰을 모아놓은 자리도 아니고, 노동·교육·복지 정책을 논하는 자리에서 ‘떼법’ 비난이라니. 벌어진 입이 아직도 다물어지지 않는다.


지금 한국은 지속이 불가능해 보이는, 극소수 대기업과 부자의 나라다. 기업유보금이 국내총생산(GDP)의 34%(4400억달러)다.(<이코노미스트>) 자영업자 대출을 포함한 가계부채는 국내총생산 대비 86.6%(1200조원)로, 한국 사회에 언제 괴멸적 타격을 가할지 모를 핵폭탄이다. 대기업엔 돈이 넘치고 개인은 빚더미에 질식사 직전인데 일자리의 질은 갈수록 나빠진다. 시간당 5580원인 최저임금도 받지 못하는 노동자가 전체의 12.1%, 180만여명이다. 비정규직은 정규직보다 한달에 3시간 적게 일하는데, 임금은 절반 수준이다. 이런 비정규직이 전체 임금노동자의 45.2%, 852만명이다.(한국노동사회연구소 추산) 청년 노동자의 첫 일자리 가운데 36%가 비정규직이다. 장그래는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많다. 지옥은 멀리 있지 않다.
이 와중에 대통령은 ‘만기친람’하거나 ‘불통’이다. 대통령은 너무 꼼꼼하다. 어느 상가에 조화를 보낼지, 중앙부처 국·과장 인사를 어찌할지까지 챙긴단다. 기자의 질문 따위는 좀체 받지 않는다. 기자회견은 취임 뒤 두차례뿐. 질문자는 미리 정해져 있고, 같은 기자의 추가 질문 기회는 결코 없다. 사람들은 이를 일러 ‘불통’이라 하는데, 실은 ‘무능에 따른 회피’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며칠 전 민망한 이야기를 들었다. 2013년 11월13일 박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정상회담. 박 대통령이 (유라시아 대륙을 단일 경제권으로 발전시키자는)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와 동북아 평화협력 구상을 길게 설명한다. 푸틴 대통령은 무반응. 다른 얘기가 오가는데 박 대통령이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거듭 강조한다. 박 대통령을 멀뚱히 바라보던 푸틴이 입을 뗀다.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그걸 어떻게 실현하실 계획이지요?” 그런데 “박 대통령은 순간 멈칫하더니 주위를 돌아보더라”는 게 한 회담 참석자의 전언이다. 박 대통령은 왜 바로 답변하지 못했을까?
< 이제훈 - 한겨레신문 사회정책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