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대통령선거 당시 국정원 조직을 동원해 후보들을 지지·비방하는 댓글·트위터 활동을 벌인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항소심 재판에서 공직선거법과 국정원법 위반 혐의에 대해 유죄를 선고받고 법정구속됐다. 국정원 정치개입 사건에 대한 항소심 판결은 박근혜 대통령의 정통성에 큰 흠이 있음을 사법적으로 확인한 것이다. 18대 대선이 심각한 불공정 선거로 치러졌고, 박 대통령이 불법선거의 최대 수혜자였음도 분명해졌다. 그런데도 청와대는 철저히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은 10일 기자들의 잇따른 질문에 “대변인에게도 아무 말을 안 할 자유와 권리를 주면 좋겠다”며 언급을 피했다.
청와대의 당혹감과 충격이 얼마나 큰지를 미뤄 짐작할 수 있다. 가뜩이나 대통령의 지지도가 곤두박질치는 상황에서 정통성마저 도마 위에 올랐으니 정신이 아득할 것이다. 그렇지만 무작정 외면하고 침묵한다고 해서 지금의 상황이 해결될 수는 없다. 청와대가 ‘아무 말을 안 할 자유와 권리’가 있다고 여기는 것부터가 큰 착각이다. 정치인, 그것도 한 나라를 이끄는 지도자라면 자신이 한 말에 책임을 져야 한다. “민주당의 모략”이니 “국정원으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않았다”느니 하는 발언들에 대해 우선 사과부터 하는 것이 도리다.
박 대통령의 잘못은 단지 말뿐이 아니다. 이 정권은 그동안 국정원이 저지른 국기문란 행위의 실상을 호도하고 진상규명을 막는 데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국정원장의 선거법 위반 혐의가 무죄임을 확신한다”는 말을 한 사람들이 아직도 권력 곳곳에 포진해 있다. 황교안 법무부 장관을 비롯해 진상규명을 방해한 사람들의 책임을 묻는 것은 당연한 후속조처다. 국정원 정치개입 사건에 대한 추가 수사 역시 피할 수 없는 과제다. 원세훈 전 원장에게 누가 그런 지시를 내렸는지를 밝히기 위해 필요하면 이명박 전 대통령도 수사 대상에 올려야 한다.
사실 이 사건이 불거졌을 때 박 대통령이 걸어가야 할 길은 정해져 있었다. 선출 과정의 흠을 인정하고 더욱 겸허한 자세로 국민에게 다가갔어야 했다. 민주주의를 훼손하면서 탄생한 대통령이니 민주주의를 더 소중히 가꾸는 데 혼신의 힘을 쏟아야 했다. 만약 박 대통령이 그랬다면 ‘정통성의 흠이 있기에 오히려 더 훌륭한 대통령이 됐다’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180도 반대의 길만 걸었다. 그리고 이런 참담한 상황을 맞닥뜨린 것이다. 문제는 지금부터다. 아직도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다는 미몽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점점 더 깊은 늪에 빠져들 뿐이다. ‘부정선거가 아니었으면 당선되지도 못했을 최악의 대통령’이라는 역사의 냉엄한 평가가 정녕 두렵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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