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고 기다린 끝에 첫 손녀가 태어났습니다. 첫째를 결혼 시킨 후 8년 만에. 우리 때와는 달리 아들내외는 친밀한 계산 하에 출산 계획을 세우면서 “늦게 할머니 되게 해 드릴 테니 염려 마시고 젊게 사시라”는 농담을 던졌지만 그렇게 영악스러울 줄은 몰랐습니다.
임신 사실을 알려 오면서, 동시에 문명의 발달을 실감하게끔 뱃속의 아이 사진을 동영상으로 보내왔습니다. 흰 볼이라는 태명과 함께.
빨리 세상 구경을 하고 싶어서인지, 아님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바램을 알았는지 아이는 예정일 보다 두어 주일 빨리 세상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저 신기하고 대견스러웠습니다. 동영상으로 보내지는 모습들을 보면서.
‘생명’ 한 생명이 태어나 안겨 주는 생명의 신비함-. “생겨난 모든 것이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며,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요한1: 3~4) 그랬습니다. 바로 빛이었습니다. 나날이 다른 모습으로 자라고 있는 생명. 아이는 바로 ‘환희’ 그 자체였습니다.
우리부부는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아이들 옷 가게를 기웃거리며 다니는 쏠쏠한 재미를 만끽하며 얼마나 웃고 다니는지 모릅니다.
사내녀석 둘을 낳아 길렀기에 여자아이들 옷을 처음 만져보면서 돌아다니는 그 재미와 기쁨은 정말 대단합니다. 느껴 보지 않고는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사람이 늙어 간다는 게 그리 슬픈 일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인생의 또 다른 묘미를 만끽하고 있으니까요. 토요일 저녁마다 동영상을 통하여 만나는 손녀의 재롱은 날로 발전되어 이젠 완연한 ‘한 사람의 독립된 인격체’였습니다. 아직 말은 잘못하지만 다 알아 듣고 행동하는 걸 보면, 그저 신기할 뿐이지요. 감정의 변화, 싫고 좋음의 표현과 방법을 확연히 나타내 보이니까요. 아이가 어리다고 함부로 말하고 이야기하면 아이에게 상처가 되고 아이의 인격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치리라 봅니다.
부모를 통하여 아이가 세상에 나왔지만 아이는 스스로의 생각과 판단을 가지고 있는 우리의 소유물이 아닌, 가장 순수하고 깨끗한 영혼을 가진 한 인격체 임이 분명했습니다.
“아가야, 며눌 아가야!” 그러므로 너의 딸인 동시에, 우리의 손녀인 그 어린 새싹에게는 맘껏 사랑하면서 자주 집 앞 공원에 데리고 나가 바람결에 흔들리는 나뭇잎, 햇빛에 반짝이는 개울물, 그 물속에 헤엄치며 노는 송사리 떼들, 또 떨어져 죽은 나무 잎사귀, 공중에 나는 새, 초록의 나무들과 풀, 그리고 공원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의 모습도, 손잡고 가는 연인들의 표정도, 우는 아이들의 모습도 보여주며 함께 산책을 많이 하도록 하려 무나. 이 모든 것들이 아이의 선생님이 아니겠나.
부디 이 학원 저 학원으로 아이를 끌고 다니지 말았으면 한다. 우리는 아이에게 사랑만 주자. 그러나 우리의 생각까지 주지는 말자. 단 나누며 살아야 한다는 것은 가리키자. 사과 한 조각, 오이 한 조각이라도 자기 입에만 넣지 말고 “아빠도 엄마도 주세요”라고 하면서 먹이자.
공원이나 밖에 나가서도 자기가 좋아하는 밥풀 튀김을 먹으면서 옆에 앉은 모르는 친구에게도 주는, 나눔을 가리키며 욕심 없는 사람으로, 그리고 감사 할 줄 아는 사람으로 키우자.
늘 기도한다. 그 아이, 그리고 그 “자손 대대로 하나님 믿는 자녀 되게 해 달라”고. 우리는 기다린다. 토요일 저녁을, 그리고 맘껏 웃는다.
< 김선 - 오타와 거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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