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근한 봄빛이 잔잔하게 퍼져가는 아침녘, 모처럼 눈 먼 시간이 아주 조금 주어졌다. 연중 가장 좋아하는 오월을 제대로 느끼지 못해 아쉽던 참인데 끝자락이나마 잡을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싶다. 모카커피 한 잔을 찐하게 내려서 창가에 앉았다. 연초록 화사함으로 치장한 뜰 안 풍경이 프레임 가득 들어온다. 보랏빛 향기를 뿜어내는 라일락 군락, 가지마다 꽃술을 늘어뜨린 떡갈나무, 잔잔하게 깔린 야생화 무리 등등, 내가 늘 동동거리며 무신경하게 드나드는 사이 자연은 성찬을 준비하고 있었나보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던가. 멀리 있는 자연만을 동경하면서 쫒아 다닌 내 자신이 좀 미안하다. 조그만 텃밭과 쭉쭉 뻗은 전나무 숲 그리고 그 사이로 이웃들의 통나무 헛간이 얼기설기 자리 잡고 있는 풍경이 한 폭의 수채화다. 우리의 삶속으로 들어온 자연, 자연 속으로 들어 간 삶, 자연과 삶의 잔재들이 자유롭게 조화를 이룬 광경이 오늘따라 정겹게 다가온다. 최근에 겪은 너구리와의 전쟁을 떠 올리며 야생동물들과도 이런 관계가 유지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은 해 본다.
얼마 전부터 침실 머리맡 천장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감지됐다. 잠이 들 만 하면 무언가가 바스락 거려 어렵게 청한 잠을 깨워놓기 일쑤더니, 얼마 안가서 묵직한 발자국 소리를 내며 천정 안을 휘젓고 다녔다. 처음엔 지붕 위에 있는 공기 정화용 팬 사이로 침입한 새나 다람쥐 정도로 가볍게 생각했다가 점점 커져가는 움직임에 긴장하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면 너구리가 분명했다. 녀석은 이웃집 지하실에 들어서 말썽 피우는 스컹크 보다야 낳겠지만 사람과 동거하기엔 거북한 존재임은 말해서 무엇 하랴. 우리 부부는 이 대책 없는 무단 침입자를 내 쫒기 위해 수시로 천장 안을 살펴보았다. 천장과 지붕 사이, 한 길도 안 되는 캄캄한 공간에는 온열재로 뒤덮인 석면과 아래 위에서 뿜어대는 더운 열기뿐 별다른 기미를 찾아낼 수 없었다. 틈만 나면 랜턴을 비추며 답답한 공간 뒤지기를 한 지 며칠째, 큼직한 움직임 속에서 재재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아마도 그 사이 새끼를 낳은 게 틀림없었다. 순간 귀밑머리가 쭈뼛 섰다. 얇은 널빤지 한 장을 사이에 두고 부부의 가장 은밀한 침실이 너구리에게로 향하고 있었음에 모골이 송연해짐은 물론, 우리가 곤히 잠들었을 엊그제 밤, 어미의 산통과 출산이 머리 위에서 이루어졌음을 상상하니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며칠 후, 너구리 일가를 퇴출시키고야 말겠다는 짝꿍의 의지 끝에 들려나온 새끼 세 마리, 아직 세상을 향해 눈도 못 뜬 채 머리를 처박고 서로 엉켜있었다. 막상 단서를 잡고 나니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게 아니었다. 새 생명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 지가 첫 관문이었다. 정부에서는 너구리 개체수가 너무 늘어나서 예산을 들여 줄이고 있다지만 우리의 영역 안에 들어 온 새 생명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고민 끝에 어미가 다시 새끼를 이끌고 본가로 회귀하기 불가능한 곳에다 유기시키기로 작정하고 집에서 먼 숲에다 놓아주었다.
문제는 그날 밤, 초저녁부터 어미가 새끼를 찾느라 천장에선 난리가 났었다. 공범인 짝꿍과 나는 새끼 찾아 헤매는 어미의 처절함에 밤잠을 설쳤다. 모성 본능은 인간 뿐 아니라 미물도 다를 바 없음을 절실히 느낀 긴 긴 밤이었다. 어미와 새끼를 갈라놓은 장본인 짝꿍에겐 어미의 거친 숨소리까지 들렸다니 그 죄책감이 나보다 훨씬 더 했나보다. 유기한 새끼들을 데려다가 어미가 잘 다니는 통로에 놓아줌으로써 우리들의 전쟁은 종지부를 찍었다. 평온해진 지금도 자리에 누우면 온몸을 던져 새끼들을 구해 낸 어미의 모성애가 천장에 느껴진다. 너구리에게 배운 한 수가 나의 지난날들을 돌아보게 한 사건, 그래서 자연은 위대하다고 하나보다.
향긋한 커피 향에 연둣물을 입힌 나의 망중한은 막 개화하기 시작한 송화(松花)를 보며 종지부를 찍는다. ‘송홧가루 날리는 유월이 오면 솔잎주를 담궈서 내 좋은 사람들에게 달려가리라’ 다짐하며.
< 임순숙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회원 / ‘에세이스트’로 등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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