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이 19일 밤 ‘국정원 직원 일동’ 명의의 보도자료를 냈다. 해킹 프로그램에 대한 유서를 남기고 숨진 국정원 임모 과장과 관련된 성명이었다. 국정원은 “이 직원은 유서에서 ‘내국인에 대한, 선거에 대한 사찰은 없었다’고 분명히 밝혔다”며 “고인의 죽음으로 증언한 이 유서 내용은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정치권과 언론의 의혹 제기를 “개탄스러운 현상”이나 “위험하고 무책임한 발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음지에서 일하는’ 게 철칙인 정보기관원들이 공개적으로 집단행동을 하다니, 납득하기 힘든 부적절한 처신이다. 도대체 세계 어느 나라 정보기관이 이런 일을 한다는 말인가.
성명 내용을 뜯어보면 민주주의 인식 수준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자신들이 ‘사찰이 없다’고 밝혔으니 국민들은 무조건 믿으라는 오만한 태도다. 대공 수사권을 갖고 있는 국정원은 피의자나 피내사자가 혐의를 부인하면 수긍하고 수사·내사를 중단하는가. 둘째, 야당과 언론을 적대·불신의 대상으로 간주해 사실상 협박했다. 국정원은 “(숨진 임 과장이)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지키고자 했던 국가안보의 가치를 더 이상 욕되게 해서는 안될 것이며, 결과에 대해 책임 또한 따라야 할 것”이라고 했다. 국정원의 주인은 세금을 내는 국민이다. 야당과 언론은 국민을 대신해 합리적 의심을 제기하는 것이다. 지금 국정원은 국민을 상대로 싸우자는 건가. 셋째, 전비(前非)에 대한 자성이 없다. 국정원은 이탈리아 업체 해킹팀으로부터 같은 프로그램을 구입한 35개국 중 자국 정보기관을 매도하기 위해 의혹을 쏟아내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고 했다. 35개국 중 상당수가 인권 후진국이라는 점은 논외로 하자. 다만 ‘조용한 나라들’ 정보기관 가운데 대선에 개입하거나 간첩사건 증거를 조작해 기소된 사례가 있는지 묻고 싶다. 해외 언론에서도 ‘한국에서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유는 국정원이 과거에도 불법 도청 등의 의혹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보도하는 터다.
국정원은 상명하복의 위계질서가 뚜렷한 조직이다. ‘국정원 직원 일동’의 성명을 자발적 행동으로 받아들이긴 어렵다. 수뇌부가 ‘지시’했거나 최소한 ‘승인’ 했을 게 분명하다. 앞서 국정원은 대선개입 사건에 대한 전방위적 물타기, 남북정상회담 회의록 무단 공개 등을 통해 정치관여를 노골화했다. 이후 국정원장 개인은 교체됐으나 국정원이란 조직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은 것이다. 성명서는 국정원 개혁이 왜 절실한지 다시금 일깨워주기에 충분하다. 민주주의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국익과 조직이기주의를 혼동하는 정보기관을 이대로 방치해선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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