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면은 아득하고 고요했다. 가끔 발자국 소리에 놀란 날벌레가 튈 뿐 그 어떤 소리도 깊은 어둠에 묻혀 버렸다. 갑자기 촛불 심지처럼 불을 밝히며 눈 앞에서 날아다니는 귀엽고 신기한 물체가 나타났다. 반딧불이었다. 도시에선 본 적이 없는 그것은 밭과 논길 사이를 자유롭게 날아다니며 우리 주위를 맴돌았다. 어둠에 익숙해질 무렵에는 손을 뻗으면 머리 위에서 만져질 듯한 별무리가 가로등인양 반짝이며 앞서 길을 밝혀 주었다. 한적한 농촌에서 맞이한 여름 밤은 감상적이고 매혹적이나 마냥 즐길 수만은 없었다. 지금쯤이면 하루의 마무리 회의를 기다리면서 앞마당은 떠들썩해야 마땅한데 우리 대원들이 묵은 숙소로부터 인기척이 없었기 때문이다.
학창시절에 남녀 8개 고교생들이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농촌계몽 활동이 목적인 클럽에 참여한 적이 있다. 여름방학이 시작된 7월 중순경 30여명의 대원들이 7박8일 일정으로 지금은 마을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충북의 한 농촌으로 떠났다. 마침 장마철이 지나간 직후라 크거나 작거나 모든 도로가 패이고, 개울물이 넘쳐 네 시간 넘게 돌아가는 산길이 험악하고, 후덥지근한 찜통 더위에 입은 옷이 땀으로 젖어 들어 불쾌지수가 만만치 않아 순간적으로 후회가 앞서곤 하였다. 그곳은 60년대 전형적인 한국의 농촌 모습을 담고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밭과 논을 에워싼 나지막한 산이 있고, 그 산밑으로 옹기종기 초가집들이 사이 좋게 웅크리고 있던 고즈넉한 곳이다. 우리 숙소는 마을 중심지에 자리잡은 마을회관이다. 주민들은 그곳에 모여 회의도 하고 마을 잔치도 연다고 했다. 도착한 다음 날부터 우리는 여러 그룹으로 나눠져, 낮에는 동네 산등성이에서 마을 아이들을 맡아 율동과 학습을 지도하고, 집집을 방문하여 약품도 나눠주고, 집 안팎을 소독도 해주고, 일손이 딸리는 밭일을 도와주기도 하고, 준비해간 시멘트로 주민들과 함께 도로 보수에 참여하기도 했다. 밤에는 청•장년부와 처녀반, 부녀반을 열어 주민의 어려운 애로점을 듣고 배우며 교제하는 시간을 가졌다. 도시생활에 익숙한 우리로선 농민을 계몽한다기보다는 오히려 우리가 농촌을 경험하는 유익한 기회였지 싶다.
나와 한 팀을 이룬 동갑내기 Y는 말이 없으나 체격이 좋은 호남아였다. 사춘기의 남녀 학생들이라 엄격한 통제 아래 그와 나는 처녀반을 맡아 당시 사회문제로 떠오르던 <시골 처녀들의 무작정 서울 상경>에 대한 경외심을 갖게 하며, 문맹자들이 있는 만큼 <한글을 깨우치는 일>을 맡고 있었다. 그 날도 여름 밤의 유혹에 빠져들지 않고 Y와 나는 수업을 마치고 곧장 숙소로 돌아왔는데, 이미 가지런하게 놓인 대원들의 신발을 보니 뭔가 잘못된 것을 직감했다.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이 몽롱해오며 퍼뜩 짚이는 게 있어 시간을 확인했다. 분명히 9시쯤 되었어야 하는데 수업 중에 한번 들여다본 똑같은 시간인 7시30분이 아닌가. 농촌봉사대를 이끌고 온 단장은 대원들 앞에서 지금 10시까지 어디서 무엇을 하다 왔는지 추궁하기 시작했다. 이 갑작스런 상황에 우리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시계가 고장난 줄도 모른 채 규정대로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것을 증명해야 했으니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규칙을 어기고 둘이 데이트하다 돌아온 것으로 간주될 판이었다. 아마도 로맨틱한 농촌의 밤이기에 그리 상상하고 싶었으리라. 대원들의 표정은 은근히 우리가 걸려들기를 기대하는 눈치였는데 단장만이 갑작스런 사태에 당황하는 기색이 엿보였다. 나는 멈춘 시계를 풀어 확인을 요청하며 수업 도중에 딱 한번 확인한 시간과 똑같음을 정직하게 말했다. 얼마간 정적이 흐른 후, 결국 우리는 무죄를 선고 받았다. 만약 유죄가 인정되었다면 일주 내내 식사당번과 반성문 제출을 해야 하고, 심하면 클럽에서 불명예 퇴출되는 벌칙을 당할 수 있었는데, 비로소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래도 진실이 통할 수 있던 시절이었기에 지금까지도 위로가 된다. 황당했던 그 추억은 문득 Y에 대한 궁금증을 일으킨다. 그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아니, 아직 건강하게 살아나 있는 걸까?...
내 잃어버린 시간 속을 더듬다 숨은 그림 하나를 찾아낸 것이다. 때묻지 않은 그 추억은 방금 피어난 꽃처럼 싱그럽다. 오해는 불신으로 치달아 예상치 못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음을 일깨워준 나의 첫경험인 그 날의 추억! 그 후 5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삶은 내게 가르쳐 주었다. 진실이 왜곡되었을 때는 반드시 그 진실이 밝혀질 것을 믿고 때를 기다려야 하며, 아무리 하찮은 경험일지라도 결코 인생에 무의미한 것은 없다는 사실이다. 모처럼 추억 따라 귀여운 반딧불과 어울려 농촌의 밝은 달빛 아래 논길을 걸으니 은은한 그리움이 바람결에 일렁인다.
< 원옥재 - 수필가 / 캐나다 한인문인협회원, 전 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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