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적반하장의 세력들

● 칼럼 2017. 7. 19. 14:17 Posted by SisaHan

1649년 1월20일, 영국. 국민의 대표들은 국왕 찰스 1세에 대한 재판을 열었다. 국왕은 대헌장과 권리청원을 무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민의 대표인 의원을 무단체포하려고 의회에 난입하기도 했다. 국왕에게 적용된 죄명은 ‘대역죄’였다. 국왕은 혐의를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의회의 사법권 행사를 부인하면서 법정의 권위를 부정하였다. 당시 영국에는 법원이 존재하고 있기는 했다. 하여, 국왕의 논리가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찰스 1세는 가장 큰 부분을 간과하고 있었다. 평시가 아니었다. 두 차례의 내전에서 국왕과 왕당파는 패배하였고, 국민의 대표인 의회파가 최종 승리를 거둔 상태였다. 바야흐로 주권자가 국왕에서 국민으로 바뀌는 때였다. 이에, 국왕으로부터 그 권한을 부여받았을 뿐인 법원의 사법권은 부인될 수밖에 없었고, 오로지 국민의 대표만이 입법·행정·사법의 국가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혁명적 시기였던 것이다. 국왕에게는 이러한 역사인식이 없었다.


찰스 1세는 1649년 1월27일 참수형을 선고받았고, 사흘 후인 같은 달 30일 그 형이 집행되었다. 후세는 이를 일컬어 ‘청교도 혁명’이라 한다. 국왕이 처형되자 영국은 왕국에서 공화국이 된다. 그러나, 왕당파는 완전히 소탕된 것이 아니었고, 그들의 도전에 의해 결국 공화국은 1660년 공식적으로 종말을 고한다. 새로운 왕이 추대되고, 혁명 지도자들은 사형, 종신형을 선고받거나 심지어 부관참시를 당하기도 했다. ‘왕정복고’라 불리는 청교도혁명에 대한 반혁명이었다.
영국의 민주주의는 결국 1688년이 되어서야 ‘명예혁명’이라 일컬어지는 무혈혁명으로 완성된다. 국왕의 처형이라는 급격한 변화를 겪었지만 혁명의 마무리에는 무려 40년이 필요했던 것이다.


지난겨울, 연인원 1600만명의 국민이 촛불집회를 열어 당시 행정부의 수반을 몰아냈다. 그는 구속되어 재판을 받고 있다. 하지만, 처형되었던 영국의 찰스 1세처럼 자신의 혐의를 부인함은 물론이고, 심지어 재판을 받을 수 없다고도 한다. 국정 파탄의 수괴뿐만 아니라, 주요임무 종사자 대부분이 자신들의 잘못을 반성하기는커녕 빠져나갈 궁리를 뻔뻔하게 하고 있다.
이들만이 아니다. 국정 파탄의 공범자들이 포함된 촛불집회의 방관자들은 정·관계, 경제계, 언론계 등에 여전히 건재한 상태다. 이들은 국민의 요구를 무시함은 물론, 그들의 남은 힘을 모아 촛불시민들의 성과를 언제든지 무위의 것으로 돌리려고 시도하고 있다.


그들도 찰스 1세처럼 ‘기존 질서에 따른 적법성’을 내세운다. 현행법에 따른 권한, 사유재산권, 언론의 자유 운운한다. 혁명적인 상황임에도 기존 질서에 따라 적폐를 청산하려는 촛불시민들의 호의를 역으로 이용하고 있다. 더 나아가 이들은 판결문을 위법하게 유출하는가 하면, 인사청문의 대상도 아닌 행정관을 사퇴하라고 요구하기도 하고, 증거 조작도 했으며, 국민을 고소하는 겁박을 자행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오히려 피해자인 양 행세한다. 유사 이래 국민에 대해 가장 큰 가해를 했던 자들이 자숙하기는커녕 적반하장의 태도를 보이고 있다.
촛불혁명에 대한 반혁명이 시작되었다는 조짐으로 보인다. 촛불혁명은 아직 진행 중이다. 영국에서는 국왕을 처형하는 극단적인 과정을 겪고도 혁명 완수에 40년이나 걸렸다. 하물며, 우리는 체제의 변화 없이 기존 질서와 법률로써 혁명과업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니, 더 어려울 수 있다. 역사인식이 결여된 자들의 반혁명적인 행태에 대응하고 이를 응징할 대비를 해야 할 때다.

< 이정렬 - 전 부장판사, 국민TV이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