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수많은 고민과 갈등 가운데 정의와 불의 사이의 줄타기가 아마 가장 힘들고 심각한 부분일 것이다. 타협을 할까 말까, 원칙과 소신을 고수할 것인가, 굽히고 훼절할 것인가 하는 양심의 기로가 때로는 생사를 가름하는 선택이 되기도 할 뿐더러, 양심과 도덕에 그치지 않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 명예가 달려있는 문제이기도 한 때문이다.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요 역적이 된 이완용은 처음부터 작정하고 조국을 배반했을까? 물론 국운에 가망이 없다는 판단과 확신 하에 변절한 것일 테지만, 한때 독립협회장까지 지낸 그가 일본의 앞잡이로 변신하기까지는 그 나름 수없이 고심했을 것이다. 망국의 충신으로 남느냐, 강국에 부역하여 부귀영화를 누리느냐… 결과적으로 역사에 길이 남을 추한 인간의 반열에 오르고 말았지만.
망해가는 고려왕조에 충성을 다한 최영 장군, 그리고 정몽주가 생사의 갈림길에서 번민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조카 단종을 폐한 세조의 역모에 동참을 강요당하면서 죽음을 각오하기까지 사육신의 충과 불충, 정의와 불의 사이의 심적 갈등이 없었다면 그 또한 거짓일 것이다. 목숨을 내건 엄청난 번뇌의 늪에서 ‘의로움’을 꺾지않은 그들의 이름과 행적은 충신의 기록으로 영원히 남았다.
조선을 창업한 이성계 역시 위화도 회군을 결단하며 ‘역사의 대역죄인 아니냐’는 심경의 고뇌가 깊었을 것이다. 그는 결국 국권의 영속성보다는 개인적 야망을 대의로 삼아 역성혁명을 감행한다. 불충과 반역자의 대명사로 남을 일이지만 거사의 성공과 5백년 왕조를 이루는 바람에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궤변의 원조격 선례를 만들었다.
1995년 7월 한국검찰은 전두환을 내란죄 등으로 처벌할 수 없다며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국민이 들끓자 5개월 뒤 헌법재판소가 ‘처벌할 수 있다’는 판결로 그를 법정에 세웠지만, ‘성공한 쿠데타’논리는 사회 구석구석과 사람들 심리에 이미 폭넓게 스며들어 있었다. 그것은 불의가 통용될 수 있다는 것, 정의와 선함과 진실이 항상 이기는 것도 아니라는 양심의 타협과 합리화였고, 과정이야 어떻든 결과가 좋으면 그만이라는 편의주의와 성공 제일주의로 발전해 있었다.
이명박과 박근혜 정권을 겪으면서 늘 뇌리를 맴돌았던 것도 바로 그 ‘성공한 쿠데타’식 발상과 행태의 만연이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당선되면 그만’인 탈법 선거와 포장의 정치, 기회가 왔을 때 저지르고, 한탕 해먹고 나면 그만인 공직풍토가 그랬다. 당시의 온갖 부패와 불법들이 드러나는 요즘 국정원 적폐청산 작업을 보면 그 일단이 뚜렷이 드러난다. 이른바 ‘사자방’이라는 4대강과 자원외교·방산비리도 그렇지만, 망가질 대로 망가진 공영방송, 문화예술인을 차별한 블랙리스트와 공직사회 이너서클의 국정농단 등등 그런 한탕주의가 지배했다. 그 와중에 양심세력들과 정의를 지키겠다고 나선 사람들은 하나같이 곤경에 처하고 핍박을 받았다. 사퇴에 내몰린 문화체육부 공무원들, 제대로 수사하려다 한직으로 밀려난 검사들, 본업에서 쫓겨난 언론인들… 방송정상화를 걸고 싸우다 암에 걸려 사투를 벌이는 한 기자는 가슴 아픈 징표가 되고 있다. 그들인들 타협하고 단념해서 안락하고 풍족한 삶을 즐기고픈 유혹이 없었겠는가.
그렇게 양심과 정의로움과 진리의 길은 험난하고 고통스럽다. 착한 사람은 세상살이가 힘들고 악한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산다는 이야기가 그래서 나왔을 터이다.
‘좋은 게 좋다’. ‘대나무 보다 버드나무로 살라’ 는 말은 아주 편리한 처세의 방편으로 쓰인다. ‘뭘 그렇게 고지식하게 하느냐?’는 속뜻이 담겨있다. ‘적당히 타협하고 넘어가라’는 물타기 전략으로도 들린다. 이른바 중도와 중용으로 미화되는 인생철학이기도 하다. 성경에 나오는 『좌로도 우로도 치우치지 말라』(수 1:7)는 구절도 인용된다. 좌고우면이나 편집에 빠지지 말고 소신을 견지하라는 뜻일 텐데, 그저 ‘중립’이나 ‘적당히’로 이해한다. 중국의 공자가어(孔子家語)도 ‘수청무어’(水淸無漁), 즉 ‘물이 너무 맑으면 물고기가 없다. 사람이 너무 살피면 동지가 없다.’(水至淸則無漁 人至擦則無徒)라는 훈계가 강조된다. 그렇게 ‘좋은 게 좋은’ 방식의 처세가 현명한 생활철학으로 받아들여진다. 너무 까다롭거나 원칙만을 고집하지도 말고, 적당히 착하고, 적당히 진실하며, 적당히 눈감아주는, 대쪽이 아닌 갈대의 길, 순백이 아닌 회색의 삶이 영악하다는 솔깃한 이야기다.
다시 성경을 떠올려 보자. 적당히 타협하며 ‘좋은 게 좋다’는 교훈이던가. 예수는 현실과 적당히 물타기하는 삶을 살지 않았다. 예수의 의로움과 선함은 전혀 훼절이 없었다. 그래서 성경에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 8)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시 51:7)…라고 마음이 청결하여 눈처럼 깨끗해야 함을 수없이 강조한다. 찬송에도 「먹보다도 더 검은 죄로 물든 마음이, 눈 보다도 더 희게 깨끗하게 씻겼네」(423장) 라고 순백의 마음, 맑고 깨끗한 사람의 지조를 가르친다. 온갖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화형 당한 스데반, 어떤 상황에서도 바울사도의 선하고 꿋꿋한 신념은 후일의 영광으로 기록되고 있다. 끝까지 불의에 굴종하지 않은 손양원·주기철 목사가 추앙받는 것도 같은 연유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고후 4:17)
< 김종천 편집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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