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캐나다에서 26년을 살았다. 어린 두 아들이 초등학생 때 이민을 왔는데 그들이 벌써 결혼을 하고 자식도 낳았다. 그녀 역시 이 땅에 뿌리를 내리느라 24시간 여는 커피점, 건강식품, 컨비니언스를 거처 지금은 그랜 밸리(Gland Valley)라는 작은 마을에서 슈퍼마켓을 운영하고 있다. 나와 그녀와의 인연은 10년 전 호반문학제에서 룸메이트로 만나며 시작되었다. 부드러운 마음씨에 순박한 미소, 조용한 음성에 경상도 억양이 깔린 진솔한 대화로 우린 첫 눈에 반하고 말았다. 하루 밤을 지새운 우정이 후에 문협 임원진의 팀원으로서 신뢰를 돈독하게 쌓으며 발전을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성실함을 지녔는데 결코 당황하거나 서두르지 않는 여유까지 겸비하고 있어서 일에 몰두한 내 옆에서 동반자로 믿음직한 아우가 되어주었다.
그녀가 얼마 전에 첫 수필집 ‘석류, 그 풍요한 주머니 속엔’을 냈다. 마치 석류를 쪼개면 새콤달콤한 보석 같은 알갱이들이 흰 꺼풀 안에 촘촘히 감춰있듯이 한 작품씩 읽어갈수록 필자의 숨겨진 모습이 빛을 발하며 달려든다. 이제껏 내가 미쳐 몰랐던 부분들까지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부러움과 감동을 안겨주기도 한다.
그녀는 ‘한국의 나폴리’라 불리는 통영이 고향이다. 몇 년 전 내가 남해안에서 만난 통영은 바다의 땅으로 에머랄드빛 코발트블루의 바다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해양관광도시로서 참으로 인상적인 수채화를 남겼다. 그곳에서 자라나 향토색이 짙은 그녀는 아직도 연중행사로 장을 담그고, 막걸리를 빚고, 직접 따서 만든 국화차를 끓이는 전통적인 한국여인으로 살아간다. 층층시하의 시집살이와 맏며느리 노릇에 치어 이민을 결심했을 법도 한데, 아직도 친정 할머니와 어머니의 빼어난 손맛과 나전칠기 장인이신 아버지의 비범한 손놀림과 눈썰미를 익혀 그 재주가 비상하다. “각박한 삶에 넉넉한 향기를 채우는 나만의 비법…”으로 만든다는 막걸리는 이미 문협행사 때마다 인기몰이 된지 오래고, 그녀가 만든 콩 된장은 나처럼 감지덕지 얻어먹는 친우들도 여럿이 된다.
그녀는 온순하고 다정하여 관계를 중요시하며 살아간다. 녹록하지 않은 이민생활 속에서 가족은 물론이고 이웃과 손님과도 특별한 관계를 맺어가기에 다수의 그들이 그녀 글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매 글마다 사물에 대한 애정과 사려가 깊다. 변화 없는 일상에서도 긍정적이고 후덕스런 여인의 슬기가 엿보여 글의 감칠맛을 더해주고 있다. 감히 신세대 며느리의 징검다리가 되어주고 싶다고 외친 용감한 아날로그 시어미가 그녀인데, 장남 결혼식 하객들에게도 이 수필집을 증정했다니 얼마나 참신한 발상인가 싶다.
학구적인 그녀는 가게를 팔고 잠시 쉬는 기간을 이용해 캐나다 고교과정 학점을 이수하는가 하면, 잠시도 안주하지 않고 사이버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4년간 공부한 보기보다 당찬 끈기와 도전정신이 넘치는 여인이다. 부부간의 정(情)도 각별하여 결혼생활 38년간 부부싸움을 한 적이 없다 한다. 흔히 싸움을 못 하는 부부야말로 서로간에 소통할 기회를 잃은 문제부부라고도 말하는데, 이들이야말로 흔치 않은 부부다. 그만큼 대화도 많이 하고 일도 같이 하고 취미도 같아서 매 주말마다 온타리오 하이킹 코스를 누비는 하이커들이다. 일년에 한 두 차례는 북미주의 유명 하이킹 코스를 섭렵하여 몸과 마음이 함께 카타르시스를 맛보는 재미에 빠진다고 한다. 뒤늦게 그녀가 공부할 수 있었던 것도 남편의 특별한 배려와 도움이 없었다면 가능했을까. 서로 홀로 설 수 있도록 채워주며 성장을 돕는 부부야말로 최상의 부부가 아닐까 한다.
오늘도 그녀와 다를 바 없이 치열한 생업 전선에서 틈틈이 집안 일을 해가며 자식들의 엄마 노릇을 감당해야 하는 사람들이 그녀처럼 자신의 재능과 열정을 발휘하며 살아가긴 어려운 일일 것이다. 넉넉한 그녀, 소박한 그녀, 슬기로운 그녀, 재능이 넘치는 그녀가 쓴 글의 특징은 마치 석류의 외형은 수수하나 그 안에 숨겨진 핑크빛 알갱이가 특별한 풍미(風味)를 지닌 것 같이 삶의 이야기를 세련된 어휘와 유연한 문장과 다양한 주제로 독자를 휘어잡는데 있다고 본다. 바로 그녀가 시사한겨레 <삶과 글> 칼럼니스트 임순숙 수필가다. ”인생은 반전의 묘미로 더 살맛이 난다”는 그녀의 성숙한 고백처럼 어떤 경우라도 삶의 의미와 통찰이 가득한 별처럼 빛나는 글쓰기가 계속되길 바라며, 첫 수필집 출간을 축하한다.
< 원옥재 - 수필가 / 캐나다 한인문인협회원, 전 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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