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활짝 웃으며 “안경을 안 쓰니 썼을 때보다 훨씬 예쁘네” 한다. 듣기에 좋아 정말 그런가 싶어 마음이 흡족해졌다. 어느 날 다른 친구가 “안경을 벗으니 전혀 너 같지가 않아. 안경 쓴 네 모습이 훨씬 보기가 좋아”하는 게 아닌가. 혼란스러웠다. 기실 내 생애 반세기 동안 안경을 써왔으니 당연한 코멘트라 여기면서도 왠지 안경을 써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마음이 복잡해왔다.
불현듯 이솝 우화 ‘당나귀를 팔러 가는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가 떠올라 웃음이 저절로 나왔다. 남의 말만 듣고 당나귀 등에 아들을 태우고 아버지는 걷다가 다시 아들은 걸리고 아버지만 당나귀를 타고, 또 다시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당나귀 등을 타고 가다가 끝내 당나귀를 그들의 등에 짊어지고 장터로 가던, 줏대 없는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 말이다.
작년에 백내장 수술을 했다. 4년 전부터 시작한 백내장으로 시간이 갈수록 사물이 뿌옇게 보이며 시력장애가 심해졌다. 워낙 약시인데다 설상가상으로 백내장까지 있게 되어 더 이상 안경으로 내 시력을 조절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 백내장 수술 시 근시를 조절하는 인공렌즈를 삽입하게 되었다. 오른쪽 눈을 먼저 수술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창 밖의 불빛마다 빛 무리가 큰 원처럼 매달려 번쩍번쩍 강한 빛을 발하였다.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대신 여태 안경을 끼고도 읽을 수 없었던 TV 화면글씨를 읽을 수 있었고, 창 밖 먼 거리에 있는 희미하던 집과 숲도 선명하게 보여서 마치 딴 세상 같았다. 단지 아직 수술을 안 한 왼쪽 눈과 인공렌즈로 바꿔 낀 오른쪽 눈의 시력차이로 초점 맞추기가 힘들었다.
다행히 나 같은 사람들을 위해 다른 쪽 눈의 백내장 수술을 2주 만에 신속하게 해줘 그나마 견딜 수 있었다.
문제는 전과 달리 돋보기 없이는 책을 읽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수술 전에는 근시가 아무리 심했어도 가까운 거리는 안경만 벗으면 작은 글씨도 읽을 수 있었는데, 수술 후 그 반대 경우가 된 것이다. 불편하고 난감했다. 전에 잘 보이던 글자를 돋보기를 껴야만 읽을 수 있고, 전에 못 보던 먼 곳은 안경 없이도 볼 수 있게 되었으니, 잘된 일이라 해야 할지 잘못된 일이라 해야 할지… 신문과 책을 자주 읽는 내겐 마치 재난처럼 느껴지기만 했으니 말이다.
흔히 신체의 창을 눈이라고 비유한다. 나도 이 창을 통해 세상을 보고 즐기며, 일하며 살아가는데 그 창에 문제가 생긴 셈이다. 백내장 수술 후 검안을 하니 한쪽 눈에 난시까지 생겨 두 시력차이로 돋보기를 새로 맞춰야 했다. 50년이나 써온 돗수 높은 안경 없이도 돌아다닐 수 있게 된 점은 분명 신기하나, 한편으론 작은 글씨 하나라도 읽으려면 돋보기를 찾아야 하니 마음이 편하지 않다.
이제 보니 각종 서류 글씨는 어찌나 작은지 아예 읽으려는 시도도 할 수 없다. 나이와 함께 온 퇴행성 증세의 하나로 알고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는데 그게 쉬운 일은 아니다. 마치 더 이상 쓸모 없는 사람이 된 무력감이 느껴질 때가 더 많으니 말이다. 그래서 삶 속에는 새로 얻은 것이 있으면 반드시 잃는 게 있기 마련임을 일깨우고 있다.
새 창으로 바깥 풍경을 바라본다. 안경 없이도 하늘과 숲이 선명하게 보인다. 불현듯 내 젊은 날에 먼 거리를 볼 수 없었던 것 같이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며 도우며 살았던 적이 없었던 점이 떠오른다. 오로지 나, 내 가족, 내 교회, 내 친구들만 챙겼지 싶다. 얼마나 근시안적인 행동이었는지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어쩌면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더 늦기 전에라도 새 창으로 바꿔 끼워야 했던 게 아닐지. 이제부터라도 나 아닌 이웃들에게 관심을 갖고 바라보며 도우라고, 또 그들의 처지와 입장을 돌아보며 나 자신만을 보듬지 말라는 충고로 이해하고 싶다면 지나칠까. 그래서 멀리 볼 수 있는 창은 넓게 열리고, 더 이상 나만 보지 말고 이기적이지 말라고 가까운 창은 닫혀 버리는 게 아닌가 싶다. 참으로 공평한 처사가 아닌지…이제부터라도 젊은 날에 잘못 생각하고 행동한 것들을 고쳐 나가라고 새 창은 내게 그리 충고하는 것으로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닫히며 열린 세상, 바로 이것이 백내장수술 후 내가 깨달은 세상이치다.
드디어 새 안경을 맞췄다. 수술한지 일년이 되면서부터 조금씩 난시가 생기긴 하였으나 마침내 내게 익숙한 안경 낀 내 모습을 되찾았다. 다만 전과 달리 가끔은 안경을 벗고도 세상을 바라보며 즐길 수 있게 되었고, 점차적으로 돋보기 사용도 익숙해가고 있다. 열린 창에 가득 채운 밝은 빛으로 활기찬 오늘을 맞는다.
< 원옥재 - 수필가 / 캐나다 한인문인협회원, 전 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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