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일러 부자, 미국 보스턴서 검찰에 체포
특수부대 그린베레 출신…레바논서 활동
화상 재판 참석…“인도 요청 응하지 않을 것”
일본 자동차 기업 닛산의 카를로스 곤(66) 전 회장의 ‘극적인 일본 탈출’을 도운 미국인들이 체포됐다. 가택연금 상태에 있던 곤의 탈출을 도운 이들은 특수부대 출신 미국인과 그의 아들이었다. 곤의 탈출을 설계했다고 알려져 인터폴의 적색수배를 받고 있는 곤의 부인 캐롤 곤은 아직 도피중이다.
<파이낸셜타임스> 등은 미 법무부가 20일 곤의 탈출을 도운 혐의로 그린베레 출신 마이클 테일러(59)와 그의 아들 피터 테일러(27)를 미 보스턴에서 체포했다고 보도했다. 미 매사추세츠주 연방검찰은 이날 아들 피터가 보스턴에서 레바논 베이루트로 떠나기 직전 두 사람을 체포했다. 브라질·레바논·프랑스 국적을 지닌 곤은 현재 베이루트에 머물고 있다.
테일러 부자는 이날 수감자용 주황색 옷을 입고 마스크를 한 채 화상시스템을 통해 가상 법정에 출석했다. 이들의 변호인 폴 켈리는 “사건이 보이는 것처럼 간단하지 않다”며 “어떤 인도 요청에도 이의를 제기하겠다”고 말했다. 일본은 아직 범죄인 인도 신청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테일러 부자가 도피 전문가라며 “두 사람의 보석을 허가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카를로스 곤 전 닛산 회장의 탈출을 도운 혐의를 받는 마이클 테일러(앞쪽)와 조지-안토니 자이크가 지난해 12월30일 터키 공항에서 방범 카메라에 찍혔다.
이날 법정에서 공개된 공소장에는 테일러 부자가 곤을 검은 상자에 숨겨 자가용 비행기로 도주하는 과정이 자세히 담겼다. 곤은 지난해 12월28~30일 이들과 함께 도쿄에서 오사카 간사이 공항으로 이동해, 검은 악기 상자에 숨어, 터키를 거쳐 레바논 베이루트로 도피했다. 미국 검찰은 “최근 역사상 가장 뻔뻔하고 잘 조직된 탈출”이라고 말했다.
그린베레 출신으로 한때 민간 보안업체를 운영해 명성을 얻기도 했던 아버지 테일러는 아들과 함께 치밀하게 곤의 탈출을 준비했다. 우선 아들 피터가 곤이 탈출하기 전날인 지난해 12월28일 도쿄 그랜드 하얏트 호텔에 투숙했다. 피터는 다음날 오후 이곳에서 곤을 만났다. 이전에도 피터는 지난해 3차례 일본을 방문했고, 최소 7차례 가택연금 중인 곤을 방문했다.
아버지 테일러는 탈출 당일 또다른 조력자인 조지 자이크와 함께 두바이에서 오사카 간사이 공항으로 가 근처 호텔을 잡은 뒤 곧 도쿄로 향한다. 이들은 악기 케이스로 보이는 두 개의 커다란 검은 상자를 가져왔고, 공항 직원에게는 음악가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도쿄 하얏트 호텔로 가 피터와 곤과 만났고, 이후 피터를 뺀 세 사람이 간사이 공항 근처에 미리 잡아놓은 호텔로 다시 이동했다.
당시 호텔 영상을 보면, 세 사람이 호텔 방에 들어간 뒤, 아버지 테일러와 자이크가 큰 상자를 들고 나오는 장면이 나온다. 이 상자 속에 숨어있던 곤은 엑스레이 등 보안 검사를 받지 않은 채, 자가용 제트기에 실려 터키를 거쳐 레바논으로 이동했다. 테일러 부자는 곤을 베이루트로 탈출시킨 뒤 함께 베이루트에 머물다가 아버지 테일러는 올해 2월, 아들은 3월에 각각 미국 보스턴으로 돌아왔다.
곤 탈출 작전을 주도한 아버지 테일러는 그린베레 출신으로 다양한 군 경력을 가졌다. 메사추세츠주에서 고교를 마친 뒤 군에 입대했고, 냉전 시절 이동식 핵무기를 폭발시키는 임무를 띤 소형 핵 배낭 요원으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졌다. 1980년대 초 내전 중인 레바논에 파견돼 기독교 민병대 지원 임무를 맡았고, 이를 계기로 현지 기독교 세력과 관계를 맺었다.
제대 뒤에는 1994년 요인 구출과 시설 경비 등을 하는 민간 보안업체(AISC)를 세웠고, 1999년 레바논에 억류됐던 미국인 부부의 딸과 손주를 성공적으로 구출해 호평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2008년 아프가니스탄에서 테러 단체에 납치된 <뉴욕타임스> 기자를 구출하는 데 실패한 뒤 내리막길을 걸었다. 2012년 5400만달러(664억원)에 이르는 아프가니스탄 주둔 미군 훈련 용역 계약을 따내는 과정에서 부정을 저지르고, 이를 수사하던 미 연방수사국 요원에게 뇌물을 준 것으로 드러나 14개월을 복역했다.
카를로스 곤 전 닛산 회장이 지난 1월10일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일본 언론과 인터뷰 하고 있다.
곤은 1954년 브라질에서 레바논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3개의 국적을 갖고 있다. 미쉐린에서 일하다 1996년 르노의 부사장으로 옮긴 곤은 강력한 비용 절감과 구조조정으로 ‘미스터 코스트 커터’로 불리며 르노의 수익성을 개선했다. 이후 르노 자회사로 파산위기에 몰린 일본 닛산으로 가 경영쇄신에 나섰고, 2조엔(20조원)에 달하던 닛산의 부채를 취임 4년 만에 청산하는 등 일본에서 ‘경영의 신’으로 불렸다.
적자투성이 회사를 정상화하고, 닛산-르노-미쓰비시를 묶어 세계 3위 자동차 그룹으로 키워내는 등 승승장구했지만 곤은 곧 위기에 몰렸다. 프랑스 르노가 일본 닛산과의 경영 통합을 추진하면서, 국적이 다른 두 회사의 임원들이 충돌했다. 특히 닛산의 실적이 르노를 추월한 뒤 일본 임원들의 불만이 폭발했고, 이들은 곤의 부정행위를 내부고발했다. 결국 곤은 소득 50억엔을 축소 신고한 혐의로 2018년 11월 일본 도쿄지검 특수부에 체포됐고, 이후 배임 혐의 등이 추가돼 기소됐다.
곤은 지난해 12월 31일 레바논에 도착한 뒤 발표한 성명에서 “나는 더이상 부정한 일본 사법제도의 인질이 아니다”라며 일본 사법제도에 대해 맹비난했다. 레바논은 곤의 신병을 인도해 달라는 일본의 요청에 응하지 않고 있다. 일본과 레바논 사이에 범죄인 신병 인도에 관한 조약을 맺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 3월 히로유키 요시이에 법무성 부대신(차관)이 레바논 대통령을 만나 협조를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이달 초 터키 검찰은 곤의 도주를 도운 제트기 조종사 등 7명을 이민자 밀입국을 도운 혐의 등으로 기소했다. < 최현준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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