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출발선 앞에 선 30년, 시민과 함께 할 방향을 고민하자
‘위안부 운동 향후 진로’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소장
“이번 기회에 민간 단체 실정 맞는 표준회계 기준 만들어 지원을
시민사회 위축 시민들 기댈 언덕이 하나둘 무너질까 두렵기 때문”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 사건이 티브이의 유명 탐사 프로그램으로 방영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결국 터질 게 터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불쑥 걱정이 앞섰다. 사람들은 나눔의 집과 ‘정의기억연대’(정의연)를 잘 구분하지 못한다. 정의연 사건이 터진 상황에서 다시 나눔의 집 비리가 폭로되니 지금까지 애써 일구어온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중심으로 한 세계적인 전시 성폭력 고발 운동에 씻지 못할 부정적인 이미지가 덧씌워지진 않을까 걱정이 든 것이다.
그런데 정의연에 대해서는 없는 사실까지 악마의 편집 기술을 동원해 공격해대던 언론과 극우세력들이 너무도 쉽게 파악할 수 있는 나눔의 집 회계부정에는 주목하지 않고 있다. 왜 그럴까? 지속적으로 원칙적인 입장에서 일본 정부의 책임 인정과 사과를 요구하는 정의연의 운동, 그리고 국제사회에서 전시 성폭력과 성착취 문제를 공론화하고 국제연대를 펼쳐온 그 운동을 이번 기회에 지우고 싶은 것으로 생각되었다면 너무 심할까? 사실 ‘위안부’ 문제가 풀리지 않는 일차적인 책임은 책임을 계속 부인하는 일본 정부에 있다. 그리고 한국 정부도, 국회도 적극적인 해결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런데도 모든 책임을 정의연에 뒤집어씌우고 있다.
피해자에서 생존자로 그리고 인권활동가로 거듭나면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제기해온 당사자인 이용수씨는 정의연을 정면으로 부정하면서 ‘할머니를 팔았다, 이용당했다’는 기자회견을 두 차례나 했다. 극우세력들이 ‘위안부’ 운동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가 없다. 그렇게 이 여성인권 평화운동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고 있다.
회계부정이 있었다면, 그리고 윤미향 의원이 부정한 방법으로 공금을 유용했다면 분명히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렇지만 지금과 같은 방식은 아니어야 한다. 너무 성급하고 지나치다. 그 성급함과 지나침 속에서 이 운동을 이끌어온 피해자이자 생존자인 ‘위안부’ 당사자, 연구자, 전문가들은 씻지 못할 상처를 입고 있다. 활동가들은 지쳐가면서 동시에 두려움에 떨고 있다. 다른 무엇보다 2015년 12월28일 한-일 정부의 밀실합의 책임마저 윤 의원과 정의연에 돌리려는 술책은 정의연의 활동가들을 엄청난 스트레스에 내몰고 있다. 이전부터 이런 상황을 견딜 수 없었던 활동가들이 하나둘 이 운동을 떠나기도 했다. 그들에겐 이런 문제제기가 30년 동안 이 운동을 해오는 과정에서 당했던 그 어떤 모욕과 비난보다 더 아프고 힘들 것이다.
회계부정 의혹은 검찰에 공이 넘어갔으니 수사 결과를 지켜보자. 그리고 이번 기회에 민간법인과 민간단체의 실정에 맞는 표준회계 기준을 만들고 전문성 부족으로 이런 일을 제대로 처리하기 힘든 민간법인과 민간단체의 회계 정리를 지원하는 방안을 마련하자. 선진국들에서는 그렇게 한다. 시민사회가 위축되면 시민들이 기댈 언덕이 하나둘 무너지는 결과로 귀결될까 두렵기 때문이다.
지금은 앞으로 ‘위안부’ 운동, 전시 성폭력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을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할 때다. 윤 의원은 이 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고, 이 운동을 대표했다. 이 운동에서 그의 자리는 너무 크다. 그런 그가 충분한 준비 없이 급히 서둘러서 자리를 옮겼다. 윤 의원이 몇몇 의혹에 대한 결백을 주장하는 것만으로 이 상황이 쉽게 마무리되지 않는 건, 30년 동안 이 운동에 책임을 진 자로서 윤 의원이 지고 가야 할 숙명 같은 것이다. 그가 기자회견에서 밝힌 것처럼 마지막까지 의혹 해소를 위해 책임 있는 자세를 견지해주기 바란다.
이용수씨도 자신이 인권활동가임을 자각한다면 그에 따른 책임의 문제도 함께 느낄 수 있어야 한다. 피해 생존자로서, 그리고 인권활동가로서 하는 말은 무게가 다르다. 정의연 운동을 개선하기 위한 것이라면 방법과 형식이 달라야 했다.
정의연은 30년 운동을 객관적으로 돌아보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 운동의 원칙과 방향을 점검하고, 그 방향을 실현해갈 사람과 조직이 시민들과 함께하기 위한 방안을 고민해보면 좋겠다. 피해자 민족주의, 소녀상으로 대표되는 고정화된 이미지와 피해자의 성역화, 여성주의적 관점의 부족, 운동의 독점 현상 등에 대한 비판을 귀 기울여 듣고 겸허히 성찰해야 한다. 외부의 공격에 맞서는 과정에서 결과적으로 내부에 억압으로 작용한 조직 문화는 없었는지도 돌아봐야 한다.
물경 30년이다. 혁신하려는 몸부림이 없는, 관성에 내맡겨온 운동이라면 그 운동의 미래는 없다. 이 운동을 책임지고 끌고 갈 사람을 키우는 일부터 뼈아프게 점검해야 한다.
나는 ‘위안부’ 운동을 30년 동안 이끌어온 정의연이라면 새롭게 거듭나는 해법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정대협-정의연의 운동은 새로운 출발선에 놓여 있다. 이 운동의 새로운 출발을 위해서라면 나는 정의연과 함께 비를 맞는 심정으로 곁에 서겠다.
<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소장 >
'●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칼럼] “이게 나라냐”, 미국의 ‘촛불혁명’ (0) | 2020.06.10 |
---|---|
[칼럼]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그 이상한 분담 (0) | 2020.06.08 |
[칼럼] ‘채널A’ 사건, 사이비 권력들의 ‘진실 은폐’ 야합 (0) | 2020.06.02 |
[칼럼] "불가역" < 김훈 작가 > (0) | 2020.06.01 |
[칼럼] ‘한명숙 사건’이 재조명돼야 할 이유 (0) | 2020.05.29 |
[칼럼] 삼성, ‘4세 경영’은 어차피 어려운 터에… (0) | 2020.05.13 |
[칼럼] ‘재난지원금 기부’에 찬물 끼얹지 마라 (0) | 2020.05.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