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부 ‘강제’ 표현은 협상 안 했다더니…
핵심요구 거부당하고도 세계유산 등재 동의

 
 
윤석열 대통령이 5월26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악수를 마친 뒤 자리를 안내하고 있다. [연합]

 

한국이 일본과 사도광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관련 협상을 하는 과정에서, 전시물 설치 예정지인 아이카와 향토박물관에 조선인 동원 과정의 억압성을 보여주는 ‘강제’라는 표현을 명시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일본 정부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우리 쪽의 핵심 요구사항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도 사도광산의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동의해준 셈이어서 ‘저자세 협상’ 논란이 더욱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외교부는 6일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소속 이재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에게 제출한 답변서에서 “사도광산 전시 내용을 협의하는 과정에서 ‘강제’라는 단어가 들어간 일본의 과거 사료 및 전시 문안을 일본 쪽에 요청했으나 최종적으로 일본은 수용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는 지금껏 한국 정부가 일본에 ‘강제성이 드러나는 표현’을 요구했고, 일본 정부가 이를 받아들였다는 설명과는 다른 내용이다.

앞서 지난달 30일 외교부 당국자는 “(아이카와 향토박물관) 실제 전시 내용을 한·일 두 나라가 협의해 구성할 때 우리 쪽은 강제성이 더 분명히 드러나는 많은 내용을 요구했으며 일본이 최종적으로 수용한 것이 현재 전시 내용”이라고 밝힌 바 있다.

 
사도광산 관광코스의 하나로 갱도를 정비한 '도유갱(道遊坑) 코스’의 모습. ‘골든 사도’ 누리집에는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근대화의 중심 역할을 한 사도 광산의 모습을 산업유산으로 남기는 것을 기본 컨셉으로 정비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골든 사도 누리집 갈무리]

 

외교부 설명대로 현재 아이카와 향토박물관에는 “초기에는 조선총독부의 관여하에 ‘모집’ ‘관 알선’이 순차적으로 시행됐고, 1944년 9월부터는 ‘징용’이 시행돼 노동자들에게 의무적으로 작업이 부여되고 위반자는 수감되거나 벌금을 부과받았다”는 내용이 적힌 사도광산 관련 전시물이 설치돼 있다. 하지만 전시물에 조선인이 강제로 동원됐다는 명시적 표현은 빠져있다.

논란이 커지자 정부는 일본과 사도광산 세계유산 등재 협상을 벌인 결과 ‘강제성이 드러나는 표현’을 일본이 수용했다며 성과를 강조했다. 반대로 협상 과정에서 일본이 우리 쪽의 어떤 요구사항을 수용하지 않았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특히 ‘강제’(forced to work)란 표현을 명시하라고 요구했는지를 물을 때마다 “표현 문제를 일본과 협상한 것은 아니다”라며 답변을 피했다. 

 
 
조선인 노동자들의 이야기가 담긴 전시물이 설치된 사도광산 인근 `아이카와 향토박물관'의 모습. [외교부 제공]

 

이재정 의원실 질의에 대한 외교부 회신이 공개되면서 정부가 협상이 실패했다는 비판을 받는 것을 피하려고 우리 쪽의 ‘강제’ 표현 명시 요구를 일본이 거부한 사실을 의도적으로 감춘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양기호 성공회대 일본학과 교수는 “한국이 유리하게 협상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왜 이렇게 쉽게 포기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처음부터 세계유산으로 등재해주자는 결론을 정해놓고 협상에 임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고 했다. 이재정 의원은 “정부는 협상의 과정과 내용을 세세히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인이 강제동원된 현장인 사도광산은 지난달 27일(현지시각)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46차 회의에서 한국을 포함한 위원국들이 만장일치로 동의해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 신형철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