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찾은 숲이다. 
어느새 가을인가, 햇살이 따갑고 바람은 쌀쌀하다. 후덥지근하던 공기에서 습기를 걷어내어 청량한 기운이 감돈다. 그래도 아직 여름을 버리지 못했는지 숲은 온통 농염한 초록이다. 숲 길 바로 곁에는 강물이 호위하듯 발걸음을 따라 흐른다. 제법 큰 소리를 내며 제가 거기 있다고, 알아달라고 소리치는 것 같다. 물소리가 큰 걸 보니 강물이 불었나 보네, 하며 강둑으로 올라서는 내게 남편이 등뒤에서 혼잣말하듯 한다.
“물이 깊으면 조용히 흐르겠지. 얕으니까 소리를 내는 거야.” 물이 깊으면 조용하다, 처음 듣는 말은 아니다.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관심 받고 인정 받고 싶어 목소리를 높이는 게 생물의 특성이라면 강물은 무슨 연유로 그러는 것일까.
 
곁길에 들어서니 쓰러져 누운 나무가 눈에 띈다. 수령이 꽤 된 듯 힘겨운 삶의 껍데기를 벗어버린 몸이 공허하면서도 왠지 평온해 보인다. 한때 영혼을 가두었던, 그러나 이제는 빈 주머니에 불과한 몸체에 구멍이 숭숭 뚫려있다. 가만, 나는 그 순간 숨을 들이킨 상태에서 내뱉지 못해 절절맨다. 검은 고목에 돋아난 새싹과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주검을 뚫고 올라오는 새 생명이라니. 나는 생명의 그악스러움에 진저리를 치며 한 걸음 물러선다. 고목이 제 몸에 돋은 싹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할까. 푸르렀던 제 젊음을 다시 본 듯 반가울까. 죽은 듯한 고목에서 돋아난 새싹을 통해 육신의 빈 주머니를 내려놓고 맞게 되는 생의 부활이나 윤회를 설명하려는 것일까. 어쩌면 죽음이란, 삶에 대한 기억은 타인의 가슴에 남기고 영혼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다른 공간으로 옮겨가 버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꽃은 버려야 열매를 맺고, 강은 버려야 바다가 되고, 새는 둥지를 버려야 날 수 있다.”는 <법화경>의 구절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버림’에 대해 수없이 들어왔다. 그럼에도 나는 죽음을 수용하고 생을 버렸기에 태어났을 새 생명에 자꾸 마음이 붙들린다. 죽음이란 완전한 종결이 아닌 또 다른 삶의 시작임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닐까 싶어서.  
음산한 샛길을 나와 햇빛이 따가운 길로 접어든다. 가을이긴 가을이구나. 메뚜기 몇 마리가 정신 못 차리게 여기저기서 튀고 있다. 큰 것들은 꽤 멀리까지 날아간다. 부지런히 쫓아가 메뚜기 턱 밑에서 땅바닥을 발끝으로 톡톡 건드려도 보고 깨끼발로 콩콩 울려서 날려보냈다가 따라잡고 다시 날려보내며 장난을 걸어본다. 어른에겐 이곳만큼 재미있는 놀이터도 없을 것 같다. 빨간 고추잠자리도 보인다. 한국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이역 땅에서 만나니 눈물이 핑그르르 돌만큼 반갑다.
 
잠자리 한 마리로 그리움에 울컥 가슴이 젖는다. 내일 모레가 추석인데, 우리만 빠지고 다들 한자리에 모이겠지. 전을 부치는 고소한 기름냄새가 코끝에 살아난다. 음식을 준비하느라 북적이는 집안에서 이제는 일선에서 물러나 빈 방을 지키고 계실 팔순의 어머니는, 오지도 않을 맏이를 기다리며 종일 현관 문 언저리에서 눈길을 거두지 못하시겠지. 자식이 모두 모이지 못하는 명절은 아무리 북적거려도 가슴 한 쪽은 텅 비게 마련이라는 말이 가시처럼 박혀있다. 
울적해진 기분에 도중에서 발걸음을 돌리고 만다. 더 가면 또 뭘 하나 싶어서다. 남편도 내 마음을 읽은 걸까, 아니면 남편 역시 고추잠자리를 통한 심리적 연상(聯想)이 나와 같았던 것일까. 왜냐고 묻지 않고 함께 돌아서준 게 고맙다. 
머릿속에 그려지는 쓸쓸한 정경(情景)에 말없이 고개를 들어 애꿎은 하늘만 올려다본다. 가을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맑다고는 하나, 오늘따라 어찌 저렇게 파랄 수가 있을까.
 
<수필가 - 캐나다 한인문협 회원, 한국 문인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