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도사 초고 ‘10월 항쟁’…김광동 진실화해위원장이 수정, 대독시켜

 

이옥남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상임위원이 지난 1일 대구 달성군 10월 항쟁 등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위령탑에서 열린 ‘10월 항쟁 78주기·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74주기 합동위령제’에서 김광동 진실화해위원장의 추도사를 대독하고 있다. 독자 제공
 

해방 직후 최초의 대규모 민중항쟁으로 수많은 민간인 희생자를 낳은 ‘10월 항쟁’ 위령제에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10월 항쟁을 ‘10월 사건’으로 낮춰 부르고 추도사의 핵심 부분을 빼고 읽어 논란이 인다. 국가에 의한 민간인 학살의 역사적 의미를 의도적으로 깎아내린 것이란 비판이 나온다.

지난 1일 이옥남 진실화해위 상임위원은 대구 달성군에서 열린 ‘10월 항쟁 78주기·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74주기 합동위령제’에 참석해 김광동 진실화해위원장의 추도사를 대독했다. 문제는 이미 배포된 추도사에 적힌 ‘10월 항쟁’이 모두 ‘10월 사건’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추도사엔 “오랫동안 이 사건은 ‘폭동’으로 불려 왔다. 그러나 유족과 시민사회단체는 사건의 명칭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고, 그 결과 대구시의회에서 지난 2016년 8월 ‘10월 항쟁 등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위령 사업 지원 등에 관한 조례’를 제정해 현재에 이른다”고 짚었는데 이 내용은 아예 통째로 생략됐다.

10월 항쟁의 역사적 의미를 밝힌 내용도 바뀌었다. 추도사엔 10월 항쟁을 “경찰의 민간인 총격에서 촉발된 민중항쟁”으로 규정하고 “전국으로 확대돼 200만명이 참여하기에 이르렀다”고 적혀 있었지만, 이 위원은 “군경에 의해 민간인이 적법 절차 없이 희생되거나 연행된 뒤 행방불명”됐다고만 설명해 항쟁의 시발점에 국가 폭력이 있었단 사실을 가렸다.

지난 1일 열린 ‘10월 항쟁 78주기·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74주기 합동위령제’ 소책자에 실린 김광동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위원장의 추도사 초안. 빨간색 상자(별도 표시)는 최종 추도사에서 빠지거나 바뀐 부분. 독자 제공 사진 갈무리
 

위령제에 참석한 유족과 시민들은 곧바로 반발하고 나섰다. 유족 ㄱ씨는 “(추도사 원문이 있는) 책자를 다 보고 있는데도 그 부분을 빼고 읽어 유족들이 객석에서 술렁술렁했다”며 “‘폭동’에서 ‘사건’으로, ‘사건’에서 ‘항쟁’으로 오기까지 우리는 무척 고생했는데, (진실화해위가) 그런 식으로 할 것 같으면 안 오는 게 낫다.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고 말했다. 김일수 ‘10월 항쟁을 기억하는 시민 모임 4610’ 대표(경운대 교양학부 교수)도 “10월 ‘항쟁’과 10월 ‘사건’은 질적인 차이가 있다”이라며 “위령제에 와서 ‘10월 사건’이라는 표현을 굳이 쓴 건 유족회를 모욕하고 아픔을 배가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10월 항쟁은 해방 직후 미군정이 친일 경찰을 고용하고 강압적으로 식량을 공출하자 일어난 대규모 민중항쟁이다. 1946년 10월1일 대구에서 시작한 항쟁은 그해 12월까지 남한 전역 73개 시군으로 번져 3·1운동에 버금가는 규모로 커졌고, 항쟁 가담자뿐 아니라 관련 없는 민간인들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됐다.

진실화해위 관계자는 “추도사 초고를 직원들이 썼는데, 김광동 진실화해위원장 검토를 거치며 수정됐다”며 “유족회 쪽에 초안이 전달됐는데 수정본이 책자에 반영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허상수 진실화해위 위원은 “반역사적·반공지향적이라는 비판을 받는 김 위원장이 냉전 시대의 시각으로 항쟁을 ‘사건’으로 깎아내렸다”며 “뉴라이트 역사 지우기 움직임의 하나로 보인다”고 말했다.   < 김채운 기자  고경태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