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역사에서 두 번 탄핵 당한 대통령


권력 획득·유지 위해 무슨 짓이든 했던 인물
계엄·백골단·발췌개헌·사사오입·우의마의…
숱한 희생자 내고 85세 쫓겨나 90세 사망

보수 기독교 앞장 선 역사 쿠데타 성공 못해

                                                                        주진오 역사학자·상명대 명예교수

 

이승만은 대한민국에서 두 차례 대통령에 취임했지만, 두 번 모두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한번은 1925년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탄핵되었고, 다른 한번은 1960년 4.19 혁명으로 대통령에서 물러났지요. 더구나 두 번 모두 원래 헌법 초안에는 대통령이라는 직위가 없었으나, 그의 억지가 관철되어 대통령 중심제가 만들졌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1919년 3.1운동으로 일어난 임시정부 수립운동에서 대표적인 지도자로 추대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는 전혀 실체가 없는 대한공화국임시정부의 국무경에 임명되었다는 연락를 받아서, 처음에는 그렇게 행세를 했습니다. 이 정부 수립안의 대통령에는 손병희, 부통령에는 박영효가 추대되어 있었어요. 이 정부는 사실상 실체가 없는 종이 정부에 불과했습니다.

 

한성정부 집정관 총재 지위가 임시정부 대통령 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이를 배경으로 사무실을 열고 국무경의 업무를 시작했어요. 그는 한국을 아시아 최초의 기독교 국가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필라델피아에서 제 1회 한인회의를 주도하였습니다. 이 대회의 의장은 필립 제이슨(서재필)이었고, 그를 통해 한국친우회를 조직했어요. 미국 정부에 편지를 보내어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음에 드는 소식이 서울에서 온 신흥우로부터 미국으로 도착했어요. 또 하나의 종이 정부였던 한성정부에서 집정관 총재로 추대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이를 멋대로 President로 번역하여, 대통령으로 행세했습니다. 이를 위해서 내각 명단에 같은 집정관 총재인 이동휘를 마음대로 국무총리로 격하시켰어요.

 

한성정부는 주로 국내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구성했는데, 그들이 주장하는 13도 대표자회의는 열린 적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끝까지 이를 근거로 자신이 대통령으로서의 정통성이 있다고 주장했어요. 그 시기에는 이미 대한민국임시의정원에서 국무총리에 임명되었다는 연락을 상하이로부터 받은 상태였으나 외면해 버렸습니다.

 

안창호가 이 소식을 듣고 아직 대통령이 선임되지 않았다고 편지를 보냈지만 무시하고, 오히려 앞으로 대통령이라는 직함으로 활동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했어요. 그러나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국무총리로 선임했다는 사실이 미주 동포사회에 전해져 논란이 되자, 이번에는 자임한 것이 아니라 미국 언론이 자신을 대통령으로 쓴 것이라고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이승만 상하이 도착 환영회

나랏일 아닌 자기 활동을 위한 자리가 필요했던 이승만

 

이승만은 존재하지 않는 한성정부의 권한을 내세워 공채 발행권과 구미위원부 설립을 강행하였습니다. 결국 대한민국임시정부 측도 상하이, 한성, 노령 정부를 통합하는 과정에서 한성정부의 주장을 수용하기에 이르렀어요. 그 결과 1919년 9월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사후 인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바로 상하이로 가서 대통령 직무를 수행하지 않았어요.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자신이 미국에서 활동하는데 필요한 대통령이라는 타이틀이었습니다. 그리고 국채발행권과 미주교민들이 어렵게 번 돈으로 내는 독립운동 기금을 받는 권한이었어요. 실제로 그는 수입의 18%만 상하이로 보냈고, 대부분의 지출을 자신을 포함한 인건비와 사무실 유지비로 썼습니다. 이승만이 상하이에 도착한 것은 1920년 12월이었어요.

 

그런데 상하이는 자신이 제왕 노릇을 하던 미국과 달리 다양한 경험을 가진 독립운동가들이 자리잡은 곳이었습니다. 독립운동의 방법론을 둘러싸고 이견을 좁히지 못하자, 이동휘 국무총리를 비롯한 김규식, 안창호 등이 사퇴했어요. 아울러 이승만에게 위임통치 청원에 대한 답변을 요구하였으나, 그는 1921년 5월에 미국으로 돌아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1925년 3월 18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임시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탄핵안과 면직안이 통과되었음을 알리는 독립신문 호외. 

 

결국 1924년에는 임시의정원에서 대통령 유고안이 가결되었고 마침내 1925년 3월 탄핵안이 통과되었습니다. 박은식 총리는 1925년 5월 구미위원부의 폐지령을 발표하였습니다. 이승만은 탄핵도 폐지령도 무시하고, 구미위원부를 통해 독자적인 활동을 계속했지만 활동은 미미했어요. 그러다가 1932년부터 다시 임정과 협조의 길을 걷다가 해방을 맞았습니다.

 

단정 수립 후 대통령제 관철시키고 개헌과 계엄으로 정권 연장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항복하자, 이승만은 귀국 길에 올랐습니다. 그는 극단적인 친미반소 노선을 걸으며 신탁통치 반대운동과 단정수립운동을 주도했어요. 1948년 5.10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동대문구 갑에 단독으로 입후보하여 무투표로 당선되었습니다. 1948년 5월 31일 개회식에서 최고령자였던 이승만은 임시 의장으로 선출되는데요.

 

그런데 헌법 제정 작업을 맡은 유진오는 국가원수의 지위와 권한은 대통령이, 정부수반으로서의 지위와 권한은 국회가 선출하는 총리가 담당하는 전형적인 내각제 헌법 초안을 국회에 제출했습니다. 그런데 이승만이 뒤늦게 대통령 중심제를 강력하게 주장하고 나섰어요. 유진오는 이승만을 설득하였으나 실패하고, 결국 대통령 중심제로 급하게 수정되었습니다.

 

48년 이승만 초대 대통령 수락연설 장면

 

마침내 국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은, 계엄과 개헌을 통해 집권을 연장해 나갔어요.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여수 순천과 제주에 계엄령을 선포하였습니다. 1948년 제주에서 4.3이 발생한 가운데, 10월 19일 여수와 순천에서 14연대가 반란을 일으키자 21일 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 뒤이어 1948년 11월 17일 제주에도 계엄령이 선포되었어요.

 

제주에 선포된 계엄 포고문

 

그런데 대한민국에서 계엄법이 제정된 것은 1949년 11월 24일입니다. 그러니까 여수와 순천 및 제주에서 선포되었던 계엄령은, 계엄법이 제정되기 전에 집행되었으므로 불법인 것이지요. 하지만 그로 말미암아 해당 지역에서의 막대한 인명과 재산 피해가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헌법과 법률에 위배되는 행위를 아무렇지 않게 감행하는 것이 이승만 정권이었어요.

 

직선제 ‘발췌개헌안’ 통과 위해 동원한 1952년의 백골단

 

이승만 정부의 실정으로 인한 민심 이반과 반민특위 실패로 인한 친일세력 득세에 항의하는 목소리가 들끓었습니다. 그 결과 1950년에 치러진 2대 총선에서 무소속이 약진하여 대다수를 차지했어요. 따라서 이승만은 국회가 대통령을 선출하면 당선될 가능성이 없게 되자, 자신의 추종세력을 내세워 자유당을 창당하고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들고 나왔어요.

 

그러나 국회가 1952년 1월 18일 개헌안을 압도적으로 부결시키자, 이승만은 백골단과 땃벌떼 등을 동원하여 관제시위를 시도했습니다. 그리고 5월 25일에는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내각책임제를 주장하는 의원들을 불법적으로 연행하는 ‘부산정치파동’을 일으켰어요. 결국 군경이 국회의사당을 포위한 가운데, '발췌개헌안’이 기립투표로 통과되었습니다.

 

독재자의 실정과 무책임, 압제를 겨냥한 독립투사의 총

 

이에 참다 못한 의열단 출신 유시태가 이승만을 저격하려다 실패하는 사건이 벌어졌어요. 같은 의열단 출신으로 안동에서 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던 김시현이 배후 인물로 구속되었습니다. 그는 영화 ‘밀정’에서 공유 배우가 맡았던 김우진의 실제 인물인데요. 김시현은 3.1운동부터 시작하여 모두 6차례에 걸쳐 15년 동안 독립운동으로 감옥생활을 했던 투사입니다.

 

그들이 이승만을 저격하려 했던 이유는 민생문제에는 무능과 실정을 거듭하면서 6.25 전쟁의 책임을 지지않는 자격미달 대통령이라는 것이었어요. 민족운동가를 멀리하고 친일세력을 요직에 등용한 것도 이유였습니다. 무엇보다 전쟁이라는 국가위기에도 관권으로 금품 살포, 깡패들과 청년단 동원 등으로 국회를 압박하는 것을 비판했어요.

 

김시현은 법정에서 ’이승만은 할복자살하기 전에는 국민의 한이 풀어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김시현은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무기로 감형되었다가, 4.19 혁명 이후 석방되었어요. 김시현은 안동에서 5대 민의원으로 당선되었으나, 5.16 군사쿠데타 이후 정계를 은퇴했습니다. 이때 형사처벌을 받았다는 이유로 아직까지 서훈을 받지 못했어요.

 

끝내 수많은 희생자 낸 ‘사사오입’ ‘우의마의’ 의 장기집권 야욕

 

그럼에도 이승만은 1952년 8월 5일 직접 선거로 실시된 제2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었습니다. 그러자 이승만은 대통령 3선을 금지하는 조항을 폐지하는 개헌안을 제출하였는데, 당시 개헌 가능 의결정족수는 재적의원의 2/3 이상인 136명이었지요. 하지만 1954년 11월 27일 국회에서 투표를 한 결과, 찬성이 135표에 불과해 부결이 선포되었습니다.

 

그런데 이틀 후 사사오입 이론을 들고 나와, 135표가 개헌선이라고 번복했어요. 이런 억지를 통해 1956년 3대 자유당 대통령 후보로 추대되었습니다. 이때 이승만이 ‘나이 팔십이 넘어… 물러가는 것이 옳을 줄로 생각한다"고 마음에 없는 불출마 서한을 보냈지요. 그러자 자유당은 우의마의(牛意馬意)까지 동원한 관제 시위를 벌였고 이승만은 마지못한 듯이 출마하여 당선되었습니다.

 

1960년 3월 15일 4대 대통령 선거에도 이승만은 85세의 나이로 출마를 했어요. 이번에도 야당 후보가 선거 기간 중에 사망함에 따라 그의 당선은 확정되어 있었습니다. 부정선거는 바로 장면의 재선을 막고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 추진되었어요. 혹시 모를 80대 대통령의 유고 시에 야당 부통령에게 정권이 이양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부정선거에 대한 반발이 마산에서 시작되자, 일단 민심수습 5개 항목을 지시했어요.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대되면서, 4월 19일에 경찰이 학생, 시민들에게 발포하여 수많은 희생자를 냈습니다. 그러자 이승만은 ’잠복한 공산주의자 간첩이 배후인 폭동‘이라며 다시 계엄령을 선포했어요. 하지만 출동한 계엄군은 시위대에게 발포하지 않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4.19혁명 당시의 시위 장면

 

85세에 쫓겨난 독재자, 하와이 요양원에서 90세에 죽다

 

미국을 비롯한 열강들도 그에게 등을 돌렸고, 4월 25일에는 교수단이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고 거리시위에 나섰지요. 결국 그는 4월 27일 국회에 대통령직 사임서를 제출하였고 즉시 수리되었습니다. 4월 28일 이화장으로 물러갔다가, 5월 29일 하와이로 망명하였는데, 그는 계속해서 귀국을 원했지만 미국과 박정희 정권은 허락하지 않았어요.

 

경무대를 떠나는 이승만(왼쪽) 대통령 사직서(가운데) 끌어내려진 이승만 동상

 

이승만은 1965년 7월 19일 하와이의 요양원에서 90세로 사망했습니다. 유가족과 지지자들은 국장을 요구했으나 박정희 정권은 국민장을 제안했지요. 그러자 결국 7월 27일 가족장으로 현충원에 묻혔습니다. 박정희는 "이승만 노인은 국헌을 준수해야 할 본분을 망각한 채, 헌법을 유린하고 국민의 권리와 자유를 짓밟은 독재자였다“라고 규정하였어요.

 

지금 대한민국도 대통령의 친위 쿠데타 시도로 유례없는 혼돈에 빠져 있습니다. 그런데 실패한 대통령은 여당과 극우 세력들을 선동하며 여전히 위기를 증폭시키고 있지요. 그런데 이런 모습은 이승만 시대를 연상시킵니다. 반공을 내세워 정치적 반대세력을 빨갱이로 매도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한다면서 국민의 기본권을 박탈하려 했어요.

 

기념관, 동상, 영화, 유투브, 보수 언론… 이승만 지지자들의 역사 쿠데타

 

이들은 최근에 이승만을 부활시키려고 집요하게 노력해 왔습니다. 전 국가보훈부 장관은 재직 시절 이승만 기념관을 건립하겠다고 공언하였고, 보수 기독교가 지원을 하고 있어요. ‘건국전쟁’이라는 다큐 영화를 만들고 관람객들을 동원했으며, 보수 언론은 물론 이영훈 무리가 운영하는 ‘이승만 학당’을 비롯한 여러 유튜브 채널들이 거짓 신화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반면에 이승만의 실체를 역사적 근거에 입각하여 대중에게 알리는 노력은 거의 보이지 않아요. 그저 ‘4.19 혁명 정신을 계승한다’는 헌법 전문을 내세우는 비판 정도가 대부분입니다. 이승만의 실체에 대해서 많은 연구가 있지만 거의 대중에게 알려져 있지 않아요. 그러는 가운데 극우 세력들의 역사왜곡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1995년에 조선일보와 중앙일보가 대대적으로 이승만 부활을 시도할 때에도 진보 학계와 언론의 대응은 미미했어요. 모두들 이승만을 땅에 묻었다고 생각하고 전혀 대비를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최근에도 유명 출판사 대표에게 이승만에 대한 연구논문들을 모으거나, 또는 그의 평전을 제안했으나 단칼에 거절당했는데 이것이 현실이지요.

 

윤석열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압살하면서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워 종신독재를 꿈꾸었던 이승만처럼, 이번에 불법적인 비상계엄을 선포하였다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의 추종자들은 이승만을 국부로 칭송하며 역사 쿠데타를 시도하고 있지만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으로 믿어요. 그들은 결국 이승만처럼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