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여성의 날 쾰른·카셀에 설치

 
 
8일(현지시각) 독일 쾰른의 나치기록박물관 앞에서 2차대전 종전 80년을 맞아 준비한 전시 ‘2차 대전에서의 제3세계’ 일환으로 소녀상이 설치됐다. 사진 장예지 특파원 

 

세계 여성의 날인 8일(현지시각), 독일 쾰른에 새롭게 앉은 ‘평화의 소녀상’(소녀상) 옆 빈 의자엔 분홍빛 양귀비와 장미가 놓였다. 누구나 앉을 수 있는 이 의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빈자리와 더불어, 희생자의 마음을 느끼고 공감하는 공간을 상징한다. 이날 독일 쾰른과 카셀, 베를린에 놓인 소녀상 옆엔 ‘위안부’의 역사를 기억하고, 폭력으로 희생된 여성들을 추모하는 독일의 시민들이 모였다.

 

8일 화창한 낮 쾰른의 나치기록박물관 앞에서 열린 소녀상 제막식엔 250여명(경찰 추산)이 모여 길목을 꽉 채웠다. 여성의 날과 소녀상 설치를 축하하기 위해 꽃을 들고 온 사람들은 소녀상을 감싼 보라색 장막이 걷히자 환호했고, 동상 주위를 화려한 꽃으로 장식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게슈타포(나치 비밀경찰) 본부 건물로 악명을 떨쳤던 박물관 건물을 등진 소녀상은 이곳을 걷는 사람들을 마주하는 방향에 놓였다. 붉은 장미를 갖고 소녀상을 찾은 수잔느(59)는 “신문에서 제막식 소식을 보고 왔다”며 소녀상 이야기는 “모든 여성들과 연결돼 있다. 지금이라도 (과거의) 역사를 인정하고, 희생된 사람들에게 존중을 표하는 일은 늦지 않았다”고 말했다.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쾰른에서도 소녀상 설치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전시는 2년 전부터 기획됐지만, 지난달 초 헨리에테 레커 쾰른 시장이 일본과의 외교 관계를 우려해 소녀상 전시를 금지했다. 그러나 독일과 벨기에, 프랑스, 미국 등의 시민단체에서 공개 항의 서한을 보내고, 지방의회와 시 당국 정치위원회도 소녀상 설치를 요구하면서 레커 시장도 방침을 철회했다. 이에 전시를 기획한 단체 ‘리서치 인터내셔널’은 쾰른 시 당국과의 갈등도 따로 정리해 박물관에 관련 언론 기사와 쾰른시 공문 등을 함께 전시했다. 큐레이터 카를 뢰셀은 “우리가 소녀상을 세우는 과정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또 이것이 얼마나 쉽지 않았는지를 관람객에게 보여주고자 했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크리스타 아레츠는 “소녀상이 세워지는 어느 곳에서건 일본 정부의 압박이 있었다. 이는 2차 대전 기간 아시아 국가에서 납치돼 일본군에 의해 학대받은 여성들에 대한 성적 폭력을 기억하는 일 또한 막는 것이었다”며 “하지만 이 동상은 일본뿐 아니라 독일군에 의한 여성 성폭력 문제를, 그리고 현재도 반복되는 성폭력 문제를 모두 상징한다”고 말했다.

세계 여성의날인 8일(현지시각) 독일 쾰른 나치기록박물관 앞에서 열린 평화의 소녀상 제막식을 찾은 시민들. 경찰 추산 250명 가량이 모였다. 사진 장예지 특파원

 

쾰른 지역에 처음 둥지를 튼 소녀상은 나치기록박물관이 2차대전 종전 80년을 맞아 준비한 전시 ‘2차 대전에서의 제3세계’ 일환으로 기획됐다. 소녀상도 이 전시 기간(3월7일∼6월1일) 동안 박물관 앞에 설치될 예정이다. 쾰른 소녀상은 지난 2021년 드레스덴 주립민속박물관 기획전시 기간에도 박물관 일본궁전 안뜰에 설치돼 관람객들을 만난 적이 있다.

 

이번 소녀상 설치에 함께한 재독 시민단체 코리아협의회의 한정화 대표는 제막식 연단에 서 “드레스덴 전시 당시에도 일본 대사관의 방해가 있었다”며 “그런 소녀상이 이렇게 쾰른에서 다시 빛을 보게 됐다. 단지 몇 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소녀상이 더 오래 이곳에 있을 수 있길 소망한다. 소녀상은 평화와 정의를 갈망하는 사람들을 한데 모으는 힘이 있다”고 말했다.

 

세계 여성의날인 8일(현지시각) 독일 쾰른 나치기록박물관 앞에서 열린 평화의 소녀상 제막식에 꽃을 들고 찾은 시민들. 사진 장예지 특파원

 

제막식엔 전쟁과 분쟁 지역에서 성폭력 피해를 입은 여성들을 지원하는 독일 인권단체 메디카 몬디알레 창립자인 의사 모니카 하우저를 비롯해, 이민자와 난민, 흑인 여성들을 지원하는 여성단체 ‘아지스라’ 등 여러 시민사회단체도 참여했다.

 

아시아계 독일인을 위한 이주민 단체에서 활동하는 베레나 요가라야(33)는 “소녀상 설치를 두고 늘 일본 정부가 싸움을 일으킨다는 이야기를 한 친구에게 들었다. 그래서 우리도 연대의 뜻으로 나와 제막식을 열 수 있도록 힘을 더했다”며 “소녀상은 현재의 여성들이 싸우고 있는 문제들과도 연결돼 있다”고 말했다.

8일(현지시각) 독일 카셀 지역의 교회 ‘노이에 브뤼더키르헤’(새로운 형제들 교회) 부지 앞에 설치된 평화의 소녀상 누진. 이날 제막식 축하 행사에선 우크라이나 난민 여성으로 구성된 합창단이 축가를 불렀다. 사진 시민단체 ‘이니셔티브 세이브 누진’ 홍소현 활동가 제공

 

일본 정부의 철거 압박을 받고 창고 신세가 됐던 독일 카셀 지역의 소녀상도 이날 새로 둥지를 틀었다. 카셀대학교 교정에 세워졌던 ‘누진’은 2023년 여성의 날 행사 다음날인 3월9일 대학 당국에 의해 철거됐다. 그러나 2년이 지나 맞이한 여성의 날, 누진은 카셀대 인근 교회 ‘노이에 브뤼더키르헤’(새로운 형제들 교회) 부지에 재설치됐다. 이 소녀상의 전시 기한은 1년이다.

 

같은날 베를린 미테구에 있는 소녀상 ‘아리’ 앞에서도 집회가 열려 여성의 날을 축하하고, 아리에 대한 철거를 통보한 미테구청을 규탄했다. 베를린에선 지난달 16일 별세한 여성인권운동가 길원옥 할머니의 분향소도 열어 추모객을 맞이했다.

8일(현지시각) 베를린 미테구 앞에 놓인 평화의 소녀상 ‘아리’와 함께한 베를린 시민들. 사진 코리아협의회 제공

< 한겨레[ 쾰른/장예지 특파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