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만 당했다”? 누가 누구를 이용하는가성찰 필요

 위안부 운동사는 다층적·복합적, 여성·인권·평화 국제연대

        

어떤 사태에는 원인이 있다. 그 원인을 고려해 사태를 명명하기 마련이다. 원인은 외부/내부 요인으로 구분해 볼 수 있는데, ‘외인의 작용으로 인해 오래 봉합됐던 내인이 함께 터져 나올 수도 있고, ‘내인으로 터진 갈등이 외인을 끌어들일 수도 있다. 이를 고려해, 지금 이 사태를 뭐라 명명할 수 있을까?

사건사의 시각으로 이 사태를 보자면, 원인은 지난 57일 일본군 위안부피해생존자이자 인권운동가인 이용수 할머니의 기자회견이다. 피해생존자의 고통이 배인 절박한 말과 인권운동가의 지난 운동의 방향과 방법에 대한 비판적인 말이 뒤섞여 토해졌던 기자회견이었다. 일본군 위안부문제가 30년 동안 답보 상태인 현실을 고통스럽게 마주하고 목소리를 냈다. 이용수님의 말은 윤미향과 정의연을 향하기도 했지만, 또한 말잔치 외에 실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한국 정부, 역사부정론에 입각해 강경한 태도를 고수하는 아베 정부를 향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파편화된 목소리 막바지에 돈은 왜 마음대로 할머니들한테 안 쓰고 저거 마음대로 써. 그렇게 당하고 있었다가 섞여 나오면서, 대다수 언론은 약 한 달 동안 연일 윤미향 사태또는 정의연 사태로 명명된 엄청난 양의 보도를 쏟아냈다. 그런 명명은 일본군 위안부운동의 대표 활동가(윤미향)와 단체(정의기억연대)에서 사태의 원인을 찾고, ‘현미경 보도로 제기된 각종 의혹들을 기정사실로 바라보게 한다. 525일 이용수님의 두 번째 기자회견은 그런 보도들이 자기 확증하는 근거가 되었다. 대다수 언론은 할머니들을 팔아먹었습니다란 말을 듣고 이용만 당했다고 헤드라인으로 뽑아내면서 그야말로 적극 이용했다. 증언 연구자라면, 이용수 할머니가 어떤 생각과 감정으로 어떤 맥락에서 말하고 있을까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어렵게 결들을 헤쳐 나가고 있었을 거다. 그러나 대다수 언론은 정해진 프레임으로 그 말을 절취해 우겨넣었다. 요샛말로 흑화폭로 저널리즘의 민낯이 아닐까?

한편, 음모론의 문법으로 기계적으로 대입한 저널리스트와 유튜버들은 이 사태를 이용수 사태로 바라봤다. 이용수 할머니 대 윤미향·정의연 대립 프레임은 그렇게 진영화된 구도로 빨려 들어갔다. 대립적인 사태 명명은 이용수 할머니, 윤미향, 정의연 모두에 대한 혐오·증오 발화의 폭발로 이어졌다. 윤미향·정의연에겐 피해생존자를 앵벌이시킨 파렴치범, (보상)을 못 받게 해서 문제 해결을 방해하고 권력만 쫓은 전체주의자, 반일=종북 낙인, 피해자의 을 따르지 않고 기억을 의심해 일본 극우의 행태를 보인 친일파, 그리고 매춘부라는 혐오가 쏟아졌다. 급기야 이용수 할머니에게도 배후에 의해 조종당하면서 권력만 탐하는 물색없는 대구 사는 노인, 일본군 병사와 영혼결혼식한 친일 매춘부라는 혐오가 줄을 이었다.

그러나 그 어느 쪽에도 진실이 없다. 양쪽 다 가짜 사실이 넘쳐나고 진실보다는 신념이나 감정이 여론 형성을 주도하면서 같은 의견과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대안적 사실을 진실이라고 우겨대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가짜와 거짓을 계속 듣다보면 진실을 보는 눈을 완전히 잃고, 심지어 지어낸 이야기에 만족하게 되는 상황의 도래가 정말 두렵다.

난 이 사태를 탈진실의 맥락에서 바라보고 있다. 2019년 한국 사회에서도 본격화된 일본군 위안부문제의 부정·부인(denial)과 여성혐오로 무장한 <반일 종족주의> 자장 아래에 있는 여러 의도와 기획이 이용수 기자회견을 이용해 윤미향과 정의연을 일점 돌파하는 방식으로 힘들을 쏟아내면서 윤미향 사태또는 정의연 사태가 되었다. 그에 대한 진영화된 반발은 이용수 사태로 이어졌다.

참담한 건 이 사태들을 보도하는 극우 가짜뉴스 매체들은 물론, 보수 일간지들의 프레임과 숱하게 양산된 기사에서도 <반일 종족주의>의 언어들, 그 논리와 방법이 재현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정대협은 그들의 공명심을 충족하기 위해, 그들의 직업적 일거리를 잇기 위해” “개인의 인생사 따윈 아무래도 좋은 것으로 팽개치고위안부를 민족의 성녀로앞세워 시위를 벌이면서 아무도 맞설 수 없는 전체주의적 권력으로 군림하였다”(<반일 종족주의>, 337-338)는 수준의 이해와 내용이 기사마다 넘실거렸다. 이런 기사들은 일본어 온라인판으로 거의 동시에 일본에 출고되었다. 이를 받아쓰는 일본 극우보수 언론은 이 사태를 윤미향, 정의연, 이용수 할머니의 문제에 국한하지 않고 일본군 위안부운동 30년의 역사를 부정하는 사실 근거들로 삼아 보도했고, 한국 보수 언론은 이를 다시 현지(일본) 특파원 칼럼 등의 형식으로 한국어로 보도하면서 결과적으로 부정과 혐오를 진실로 포장해 보도했다.

참담한 상황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511일 이영훈 등이 개최한 <반일 종족주의와의 투쟁> 출간 기자회견에 대해선 일부 언론이 비판적인 전문가 코멘트나 기획 기사를 낸 바 있다. 그러나 얼마 전 526일 이영훈과 류석춘 교수, 반일동상진실규명공대위가 주최한 <정대협의 위안부 운동, 그 실체를 밝힌다> 심포지엄을 보도한 기사들에선 기계적인 비판 코멘트조차 아예 없었고, 일방적으로 그들의 주장을 받아쓰고 대변하는 기사가 대부분이었다. 언론이 <반일 종족주의> 시리즈를 집중적으로 다뤄주고 그 과정에서 (의도했든, 안했든 간에) 그 책의 주장이 부각되고 확대 재생산되는 상황이고, 기자들조차 그 주장에 동조하는 상호 참조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512일 수요시위 전 날 반일동상진실규명공대위와 위안부인권회복실천연대가 평화의 비(‘소녀상’) 앞에서 연 기자회견의 장면이 잊히지 않는다. 그들이 내건 펼침막에는 위안부상 철거, 수요집회 중단이란 구호가 새겨져 있었다. 태극기와 일장기를 양 손에 들고 친일이 곧 애국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의 입에서 치욕스런 위안부 이력 속속들이 까발려 모욕 준 정대협과 여가부는 용서 못할 인권침해 집단이라는 말이 나왔다. 그 동안 피해생존자들을 조롱하고 모욕한 한국 뉴라이트 부정론자들의 입에서 피해생존자들의 인권이 거론되었던 것이다. 이런 행태야말로 위안부피해자들을 간악하게 이용해먹는 복화술이다. 이렇게 보면, 이 사태는 부정과 혐오의 백래시사태로도 조명되어야 하지 않을까? 적어도 사태의 외인론 입장에서 보면 말이다.

일본군 위안부문제의 역사와 30년 운동의 진실은 결코 매끈하지도 납작하지도 않다. 울퉁불퉁하고 다층적이고 복합적이다. 그렇기에 여성·인권·평화 국제연대 운동을 만들었다는 서사에 결코 만족하지 말고, 이 사태를 계기로 삼아 30년이라는 시간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고 성찰해야만 한다. 그래야 피해자 없는 위안부운동이 가능한 건지, 아니 정말 필요한 건지, 그렇다면 어떤 방향과 방법으로 모색되어야 하는 건지 논의를 모아가면서 부정과 혐오의 백래시에 반격할 수 있는 힘이 더 두터워지지 않을까? < 강성현 성공회대 열림교양대학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