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낙청 TV' 21일 박진영과의 대담 큰 파장 어떻게 당내 경쟁을 반명 ‘반란’으로 규정하나 촛불은 특정 정권의 소유물이어선 안 된다 민주주의는 충성 경쟁으로만 흘러선 안 돼
원로 지식인의 역할은 끝까지 질문하는 것 다른 목소리를 퇴행으로 규정해서는 안 돼 촛불의 정신은 권력을 의심하는 것이어야 촛불 내세워 새로운 권위주의 만들지 말자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가 지난 21일 유튜브 채널 <백낙청TV>에서 방영된 박진영 민주연구원 부원장과의 대담이 적지 않은 논란을 낳고 있다. 민주진보 진영의 어론으로 존경을 받아온 백 교수는 ▲지난 17일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가 ‘4기 민주당 정부'이자 '2기 촛불 정부'인 이재명 정부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거의 총궐기한 것이었으며, ▲이 대통령과 지지자들이 당내 '반란'을 진압한 것이며, 특히 호남 유권자들이 압도적으로 집단지성을 발휘해 판세를 결정지었다는 점에서, '정권 교체의 완수'라고 볼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분단체제 변혁을 전제로 광범위한 중도세력이 모여야 한다며, 유시민 작가에 대해 "분단체제 빼고, 촛불혁명 빼고, 시사 논평을 너무 오래 하다 보면, 반드시 바닥이 드러나게 돼 있다"고 비판했으며, ▲'나는 대통령하고 한 몸이다. 끝까지 지켜줄 사람은 나뿐이다' 정청래 전 대표가 이런 식으로 카모플라주(위장)를 했다고 그럴까? 유시민 작가 같은 사람이 그 위장을 터뜨린(폭로한) 것,이라고 분석하고, ▲정 전 대표가 40% 득표했다고 해서 당내 40% 가까운 지분을 갖는 비주류가 성립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본다,고 평가했다.
아래 글은 이와 관련한 박철 시민기자의 글이다. 박 시민기자는 “평소 존경해 온 분의 말씀인 만큼 그냥 지나치기 어려워 적었다”고 밝혔다. <편집자 주>
백낙청 TV에서 갈무리
최근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가 유튜브 채널 '백낙청 TV'에서 민주당 당대표 경선과 이재명 정부를 둘러싸고 내놓은 발언을 접하면서 적지 않은 당혹감을 느꼈다. 오랫동안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와 시민운동, 분단체제와 변혁을 고민해 온 원로 지식인의 발언이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정파적이고, 자신과 다른 정치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을 너무 쉽게 선악의 구도로 재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백 교수의 정치적 견해 자체를 문제 삼고 싶은 것이 아니다. 지식인이 어떤 정치적 입장을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원로 지식인이라고 해서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그가 자신의 정치적 판단을 뒷받침하기 위해 ‘촛불’이라는 역사적 시민운동의 의미를 특정 정권과 정치세력의 정당성과 동일시하고, 정당 내부의 정상적인 경쟁과 이견을 ‘반란’이라는 언어로 규정한 데 있다. 이것은 단순한 표현상의 문제가 아니다. 민주주의를 바라보는 관점의 문제이며, 시민이 주체가 되어 만들어낸 촛불의 역사적 의미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다.
어떻게 당내 경쟁을 ‘반란’이라 부를 수 있는가
무엇보다 우려스러운 것은 민주당 당대표 경선 과정에서 나타난 경쟁과 갈등을 ‘반란’으로 표현한 것이다. 정당은 군대가 아니다. 당대표 경선은 상명하복의 명령체계를 확인하는 과정도 아니며, 지도부에 대한 충성도를 시험하는 자리도 아니다. 서로 다른 정치적 견해와 노선이 당원과 시민의 선택을 받기 위해 경쟁하는 민주적 절차다. 어떤 후보가 다른 후보보다 더 많은 지지를 받으면 승자가 된다. 패자는 결과를 인정하고 승자는 패자를 존중하면 된다. 그 과정에서 치열한 논쟁과 갈등이 벌어지는 것은 자연스럽다. 오히려 아무런 이견도 없고 모든 사람이 한 사람의 지도자를 중심으로 동일한 목소리를 낸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다.
민주주의에서 경쟁은 혼란이 아니라 제도화된 갈등이다. 정당은 서로 다른 이해와 가치, 정책적 지향이 부딪히는 공간이다. 노동자와 자영업자, 청년과 노년층, 수도권과 지방, 진보적 개혁파와 현실적 중도파의 요구가 모두 같을 수 없다. 정당이 다양한 사회적 요구를 담아내려면 내부에 다양한 목소리가 존재해야 한다.
그런데 당내 이견을 ‘반란’이라고 부르는 순간 모든 것이 달라진다. 반란이라는 단어에는 이미 ‘정당한 권력’과 ‘그 권력을 뒤엎으려는 불순한 세력’이라는 구도가 전제되어 있다. 그렇다면 누가 정당한 권력인가. 대통령인가, 당대표인가, 지도부인가. 아니면 그들을 지지하는 지식인인가. 민주주의의 답은 분명하다. 정당의 권력은 당원에게서 나오고 국가 권력의 정당성은 시민에게서 나온다. 당내에서 다른 후보를 지지했다고 해서 반란군이 되는 것은 아니다. 지도부의 정책을 비판한다고 해서 반당 세력이 되는 것도 아니다. 정부의 정책에 문제를 제기한다고 해서 반촛불이 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정치적 경쟁을 죄악시하는 순간 정당 민주주의는 죽기 시작한다.
촛불은 특정 정권의 소유물이 아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촛불’에 대한 이해다. 2016년과 2017년 광장을 가득 메운 촛불은 어느 한 정치인이 기획한 행사가 아니었다. 어느 정당이 시민들에게 명령해서 일사불란하게 만들어진 것도 아니었다. 수많은 평범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광장에 나와 촛불을 들었다. 학생과 노동자, 직장인과 자영업자, 부모와 아이, 청년과 노년층이 함께했다. 그들 가운데는 특정 정당을 지지하는 사람도 있었고 정치에 별다른 관심이 없던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적어도 하나의 공통된 열망을 공유했다. 권력이 국민 위에 군림해서는 안 된다는 것, 대통령도 법과 헌법 아래 있어야 한다는 것, 국가의 주인은 시민이라는 것이었다. 촛불은 특정 정치인의 집권을 위한 운동이 아니었다. 물론 촛불혁명의 결과로 정치권력이 교체되었고 이후의 정치적 변화가 촛불과 연결되었다. 그러나 그 역사적 결과와 촛불 자체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촛불이 특정 정부의 정통성을 영구적으로 보증하는 정치적 면허증이 되는 순간, 촛불은 시민의 역사에서 특정 정치세력의 자산으로 변한다. 나는 이것을 ‘촛불의 사유화’라고 부르고 싶다. 촛불을 들었던 시민들은 어느 정권이든 무조건 지지하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다. 그들이 요구한 것은 권력이 시민을 두려워하고, 시민의 감시를 받는 민주주의였다. 따라서 오늘의 정부가 촛불의 정신을 계승한다고 주장한다면 오히려 더 엄격한 검증을 받아야 한다.
이재명 정부 역시 예외가 아니다. 이재명 정부를 촛불정신의 계승자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재명 정부를 비판하는 사람을 반촛불로 몰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정부가 촛불의 이름을 내세울수록 시민들은 더 자유롭게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촛불은 권력을 신성화하기 위해 존재한 것이 아니라 권력을 시민의 통제 아래 두기 위해 존재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충성 경쟁이 아니다
오늘날 한국 정치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현상은 정책과 가치에 대한 논쟁이 사라지고 정치적 충성심을 겨루는 분위기가 커지는 것이다. 정치인은 정책으로 평가받아야 한다. 정당은 시민의 삶을 얼마나 개선했는지로 평가받아야 한다. 정부는 경제와 일자리, 주거와 교육, 복지와 외교·안보 등 국정의 성과를 통해 평가받아야 한다. 그런데 모든 정치적 판단의 기준이 ‘누구 편인가’로 바뀌면 민주주의는 충성도 테스트로 전락한다. 이재명 정부를 비판하면 반이재명이 되고, 민주당 지도부를 비판하면 반민주당이 되고, 촛불정부의 정책에 의문을 제기하면 반촛불이 된다. 그러면 정치인은 시민을 설득할 필요가 없어지고, 지지자에게 충성만 요구하게 된다. 이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동의하는 사람만 존재하는 체제가 아니다. 오히려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체제다. 정치적 반대자는 제거해야 할 적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구성하는 시민이다.
이 지점에서 진보의 의미를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진보는 권력을 비판하는 데서 출발했다. 약자의 편에 서고, 권력의 오만을 견제하고, 기존 질서의 부조리를 질문하는 것이 진보의 기본 정신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세력이 권력을 잡았다고 해서 그 권력을 비판하지 못한다면 진보는 자기모순에 빠진다. 권력을 잡기 전에는 비판을 민주주의라고 하다가 권력을 잡은 뒤에는 비판을 반역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진보가 아니다. 권력의 주인이 바뀌었을 뿐 권력에 대한 태도는 그대로인 셈이다. 진정한 진보는 자기편에게 더 엄격해야 한다.
이재명 정부가 잘하면 잘한다고 말하면 된다. 그러나 잘못하면 잘못했다고 말해야 한다. 민주당이 시민의 기대에 부응하면 지지하면 된다. 그러나 시민의 기대를 저버리면 비판해야 한다. 나는 이것이 오히려 이재명 정부와 민주당의 성공을 바라는 사람에게 필요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정권이 실패하면 결국 피해를 보는 것은 시민이다. 민주당이 실패하면 민주주의 전체에도 상처가 남는다. 그러므로 비판을 ‘반란’으로 규정하는 것은 지지하는 정부와 정당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원로 지식인의 역할은 끝까지 질문하는 것이다
백낙청 교수에게 더욱 아쉬움을 느끼는 이유는 그가 단순한 정치평론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와 시민운동, 분단체제와 변혁을 오랫동안 고민해 온 대표적인 원로 지식인이다. 그의 말에는 일반 정치인의 말보다 훨씬 큰 사회적 무게가 있다. 그래서 원로 지식인에게 기대하는 것은 정치적 충성이나 진영의 대변이 아니다. 지식인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질문하는 것이다. 자신이 지지하는 권력에도 질문하고, 자신이 속한 진영에도 질문하고, 자신이 오랫동안 믿어온 사상에도 질문해야 한다. ‘우리가 옳다’고 말하는 것보다 ‘우리가 혹시 틀릴 수도 있지 않은가’라고 묻는 것이 지식인의 본령이다.
특히 권력을 가진 쪽에 가까운 지식인일수록 더 비판적이어야 한다. 권력은 언제나 자기 자신을 정당화하려 하기 때문이다. 정부와 정당은 자신들의 정책이 옳다고 주장할 것이다. 정치지도자는 자신의 결정이 불가피했다고 설명할 것이다. 지지자들은 비판을 정치적 공격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때 지식인은 오히려 한 발 물러서서 질문해야 한다.
‘정말 그런가?’ ‘다른 가능성은 없는가?’ ‘우리 편이 잘못한 것은 없는가?’
이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있어야 민주주의가 건강해진다.
유시민 등 다른 목소리를 ‘퇴행’으로 규정해서는 안 된다
이런 점에서 자신과 다른 견해를 가진 유시민 작가 등을 촛불에 대한 태도나 정치적 수준의 문제로 일괄 평가하는 것 역시 적절하지 않다. 유시민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그의 분석이 틀렸다고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토론과 논쟁으로 해결해야 한다. 정치적 견해가 다르다고 해서 상대를 ‘촛불을 외면한 사람’이나 ‘수준이 떨어진 사람’으로 규정하는 것은 공론장의 폭을 좁힌다. 진보 안에도 다양한 의견이 존재해야 한다. 급진적인 변혁을 중시하는 사람도 있고 제도적 개혁을 중시하는 사람도 있다. 원칙을 강조하는 사람도 있고 현실적 정책과 타협을 중시하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차이는 진보의 약점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자산이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토론하면서 더 나은 길을 찾아가는 과정 자체가 민주주의다. 자신과 다른 의견을 틀렸다고 말하는 것과 그 의견을 말할 자격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유시민 작가가 7월 15일 매불쇼에 출연해 구조적 다수와 검찰개혁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이 자리에서 유 작가는 구조적 다수를 재건축에 비유하며, 이 대통령이 성공하기를 바라지만 필연적으로 실패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출처: 매불쇼 영상 갈무리
정당에서 자주 사용하는 ‘원팀’이라는 말도 다시 생각해야 한다. 원팀은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는 조직이 아니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공동의 목표를 위해 함께하는 것이 원팀이다. 민주당이 진정한 원팀이 되려면 당내 비판세력을 제거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목소리를 제도 안에서 보장해야 한다. 경선에서 패배한 후보와 그를 지지한 당원들도 민주당의 구성원이다. 그들의 모든 주장이 옳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의 존재 이유까지 부정할 수는 없다. 승자는 패자를 존중하고 패자는 선거 결과를 인정해야 한다. 그 위에서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공동의 목표를 위해 협력해야 한다. 반대 의견을 없앤 뒤 ‘원팀’을 외치는 것은 통합이 아니라 획일화다. 정당의 힘은 내부에 다른 목소리가 없다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목소리를 민주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능력에서 나온다.
촛불의 정신은 권력을 의심하는 것이다
나는 촛불의 핵심 정신 가운데 하나를 ‘권력을 의심하는 시민의식’이라고 생각한다. 촛불시민들은 권력을 믿지 않았다. 대통령이라고 해서 무조건 옳다고 믿지 않았고, 정부라고 해서 자동으로 정의롭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권력이 국민의 뜻을 거스르고 법과 원칙을 무시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에 광장으로 나왔다. 그렇다면 촛불정신을 계승한다는 것은 오늘의 권력에도 끊임없이 질문하는 것을 의미한다. 촛불정부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해서 그 정부의 모든 정책이 촛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촛불을 들었던 시민이 오늘의 정부를 비판한다면 그 비판 역시 촛불정신의 일부다. 민주당원이 민주당 지도부를 비판한다고 해서 반민주당이 되는 것도 아니다. 정부를 지지했던 시민이 정부의 정책을 비판한다고 해서 배신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민주주의는 지지와 비판이 함께 존재할 때 건강해진다.
모든 권력에는 자기 정당화의 본능이 있다. 그래서 민주주의에는 야당이 필요하고 언론이 필요하며 시민사회가 필요하다. 그리고 권력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비판할 수 있는 지식인이 필요하다. 지식인이 권력의 자기정당화 논리를 대신 설명하기 시작하면 공론장은 약해진다. 특히 ‘촛불’이라는 역사적 권위를 빌려 특정 정치세력의 정당성을 강화한다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촛불은 어느 정치인의 것도 아니고 어느 정당의 소유물도 아니다. 촛불은 광장에 나왔던 이름 없는 시민들의 역사다. 그들은 특정 정치인을 위해 촛불을 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과 미래를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되찾기 위해 촛불을 들었다. 따라서 누구도 촛불의 유일한 해석자가 될 수 없다. 백낙청 교수도 예외가 아니다.
촛불의 이름으로 새로운 권위주의를 만들지 말자
백낙청 교수의 발언을 비판하는 이유는 그가 특정 정치인을 지지하기 때문이 아니다. 지식인이 특정 정치적 입장을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문제는 그 정치적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민주주의의 원칙과 촛불의 역사까지 하나의 진영 논리 안으로 끌어들이는 데 있다. 당내 경쟁을 ‘반란’이라고 부르는 순간 민주주의적 경쟁은 죄가 된다. 비판자를 ‘반촛불’로 규정하는 순간 시민의 자유로운 판단은 충성심의 시험으로 변한다. 특정 정권과 촛불을 동일시하는 순간 촛불은 시민의 역사에서 특정 권력의 정치적 자산으로 전락한다.
그리고 원로 지식인이 이러한 논리를 뒷받침할 때 그 위험은 더욱 커진다. 나는 백낙청 교수가 자신의 발언을 다시 돌아보기를 기대한다. 그가 한국 민주주의에서 차지해 온 역사적 위치가 크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원로 지식인의 위대함은 언제나 옳은 말을 하는 데 있지 않다. 자신이 틀릴 가능성을 인정하고, 자신이 지지하는 진영이 권력을 가졌을 때 더욱 엄격하게 성찰하는 데 있다. 촛불은 우리에게 누구를 무조건 믿으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촛불은 권력을 시민의 통제 아래 두라고 가르쳤다. 촛불은 특정 정치인을 신성화하라고 하지 않았다.
촛불은 반대자를 제거하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촛불은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하나의 광장에서 함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특정 정권의 이름이 아니라 촛불의 정신이다. 촛불을 사유화하지 말자. 민주주의를 진영의 소유물로 만들지 말자. 정당 안의 비판을 반란으로 부르지 말자. 그리고 권력을 지지하는 사람일수록 권력에 더 엄격하자. 촛불의 진정한 정신은 권력의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시민의 편에 서는 데 있다. 촛불의 주인은 대통령도, 정당도, 특정 지식인도 아니다. 촛불의 주인은 시민이다. 그리고 시민에게 촛불을 돌려주는 것이야말로 오늘 우리가 민주주의를 지키는 가장 정직한 방법이다. < 박철 시민기자 : 샘터교회 원로목사. 시인. 부산예수살기 대표. 전국목회자정의평화협의회 전 상임의장. 탈핵부산시민연대 전 상임대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