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8월 시베리아 남부 투바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상의를 탈의한 채 말을 타고 있다. 푸틴은 강력한 러시아의 부활을 상징하기 위해 남성성을 과시해왔다

 

1989119일 독일의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서독은 동독과의 통일에 나섰다. 동독 등 동유럽에 주둔하던 옛소련(이하 소련)의 양보와 철수가 필수적이었다. 그러려면 소련의 안보 우려 해소가 보장돼야 했다. 반소련 군사동맹인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가 동쪽으로 확장되지 말아야 하고, 소련에게 동유럽이 안보 완충지대로 남아야 했다.

헬무트 콜의 서독 정부는 이 문제에서 적극적이었다. 제임스 베이커 당시 미국 국무장관도 19902월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게 나토의 관할 영역은 동쪽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메모로 확약했다. 이후 미국의 말은 조금씩 바뀌었다. 유럽의 안보기구는 여전히 나토가 될 것이라며, 소련이 제안한 범유럽적 동맹기구를 일축했다.

베를린 장벽 붕괴 현장에 있던 옛 소련 스파이

국내에서 장악력을 잃어가던 고르바초프는 결국 나토 안에서의 독일 통일을 승인할 수 밖에 없었다. 철수하는 소련군의 주택 건설을 위한 15억마르크의 돈만 쥐어졌고, 동독 영토에서 나토군과 핵무기 배치 제한 등이 약속됐다. 이는 동독뿐 아니라 동유럽 국가 전체에도 해당되는 논리였다. 하지만 나토를 확장하지 않는다는 공식적, 공개적 보장은 없었다.

당시 동독 드레스덴에 주재하던 소련 국가보안위원회(케이지비·KGB)38세 젊은 중견 요원은 이 모든 것을 지켜봤다. 그의 이름은 블라디미르 푸틴이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자, 푸틴의 드레스덴 사무실은 반공 폭도들의 위협과 난입에 시달렸다. “모스크바의 일이란 침묵이었다. 나라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느낌이었다.” 푸틴의 회고다. 짐을 싸고는 소련으로 철수해야만 했다. “어떻게 소련이 유럽에서 그 지위를 잃을 수 있단 말인가?” 그의 비탄은 귀향 뒤 현실 앞에서 사치스런 감정이었다. 소련은 망했고, 러시아 여인들이 한국의 신도시까지 찾아가 한복을 입고는 캬바레 전단지를 돌렸다. 나토는 동진을 거듭하며 동유럽 국가들을 회원국으로 가입시키며 러시아를 포위했다.

드레스덴에서 철수했던 그 스파이는 약 10년 뒤인 19998월 러시아 총리로 취임했다. 21세기 새로운 밀레니엄 전야인 19991231일 대통령 대행이 됐고, 20년 동안 권좌를 유지하고 있다. 또 지난 1일 국민투표에서 자신의 권력을 2036년까지 연장할 수 있는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사실상 종신집권의 문을 연 셈이다.

러시아 지정학이 소환한 권력자, 푸틴

‘21세기 차르 푸틴 대제는 러시아에 내재한 전통적인 안보 불안, 이에 대처하기 위한 팽창주의와 경찰국가화의 산물이다. 러시아는 항상 전제적인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했고, 푸틴 역시 그 일환이다.

세계 문제에 대한 크렘린의 신경강박적인 견해의 근저에는 러시아의 전통적이고 본능적인 안보 불안감이 있다. 애초에 이는 사나운 유목민족들이 이웃에 있는, 노출된 광대한 평원에서 살아가려는 평화로운 농경민족의 불안이다. () 러시아 통치자들은 외국의 침입, 서방 세계와의 직접적 접촉을 언제나 두려워했다. () 러시아 국가의 군사력과 경찰력 증가, 외부 세계로부터 러시아 주민의 고립에 대한 정당성을 제공했다. 이런 모든 것을 러시아 통치자들은 자연스럽게 본능적으로 추구한다.”

2차 세계대전 뒤 미국의 대소련봉쇄 정책의 철학적 근거를 제시한 조지 케넌의 소련 행동의 근원이라는 글에서는 소련의 비타협적 팽창주의와 경찰국가화는 러시아 지정학 역사의 산물이고, 러시아에 내재한 불안과 모순이라고 짚었다.

모스크바공국 이래로 러시아는 끝없는 팽창을 추구했다. 러시아는 광막한 평원에서 발원했다. 자신을 막을 자연적 방벽은 없고, 호전적인 주변 유목세력의 위협 앞에서 선제적인 팽창으로 안보 불안을 불식하려 했다. 영토팽창은 정복지에 살고있던 수많은 이민족의 도전을 안으로 껴앉는 한편, 확장된 영토를 관리해야 하는 부담도 배가시켰다. 그래서 러시아는 항상 국내치안과 확장된 제국 관리를 위한 전제적인 지도자와 경찰국가화로 치달았다. 안보를 위한 팽창이 안보를 위협하는 모순에 처하는 악순환에 빠지는 것이다.

2차대전 뒤 소련은 실질적인 영토를 동독에서부터 사할린까지 확장하면서, 러시아 역사상 최대 판도를 일구었다. 나폴레옹과 히틀러의 침략을 겪은 러시아가 서방 세력의 침략을 막기 위해 동유럽 전체를 방패막으로 삼은 것이다. 하지만 이는 소련에게 동유럽을 관리해야 하는 부담을 배가시켰다.

케넌은 소련의 이런 모순과 불안을 간파하고, 소련에 대한 봉쇄를 주문한 것이다. 봉쇄가 지속되면 그 불안과 모순이 붕괴로 이어질 것이라고 분석했다. 케넌의 분석대로 서방의 봉쇄로 소련은 망했다. 그렇다고 불안-팽창-붕괴로 반복되는 러시아의 지정학적 사이클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소련 멸망에 이은 10년간의 러시아 혼란과 불안은 푸틴이라는 지도자의 등장을 재촉했다. 러시아의 차르들과 요제프 스탈린 등 소련의 독재자들이 만들고 남겨놓은 비밀경찰 등 보안기구와 체제를 다시 복원해 작동시킬 수 있는 인물이 그런 지도자였다.

옐친, 푸틴을 발탁하고 여생을 의탁

고국으로 돌아온 푸틴은 19905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첫 민선시장 아나톨리 소브차크의 국제문제 보좌관으로 기용돼, 시 정부의 제1부의장으로까지 승진했다. 막후에서 일한 푸틴은 해결돼야 할 일이 있는지를 아는 사람이었고, 소브차크 시장에게는 불가결한 인물이었다. 소브차크 역시 푸틴에게는 강력한 권위주의 성향 등으로 정치적 영향을 줬다.

1996년 소브차크가 재선에서 실패했다. 새로운 시장은 푸틴을 다시 기용하려고 했다. 푸틴은 배신의 대가를 받느니 충성을 위해 교수형을 당하는 것이 좋다고 거부했다. 모스크바로 온 푸틴은 곧 보리스 옐친 대통령 정부의 대통령재산관리부의 2인자로 기용됐다. 기강이 잡힌 일처리로 그는 모스크바에 온지 1년이 안된 19973월 대통령비서실의 차장으로 오른 뒤 제1부실장으로까지 승진했다.

그는 19987월 케이지비의 후신인 연방정보국(FSB)의 수장으로 임명됐다. 푸틴은 권력의 문을 열었다. 그의 취임과 함께 러시아 비밀경찰도 부활했다. 푸틴은 체첸의 독립을 막기 위한 체첸 전쟁에서 과거 케이지비의 역량을 연방정보국에 복원해냈다. 체첸 반군에 대한 역공작, 암살이 주요 수단이었다.

절정으로 오르는 러시아의 혼란과 부패는 옐친의 권력을 조락시켜갔다. 199989일은 푸틴에게 운명의 날이었다. 옐친은 푸틴을 부총리로 지명하고 동시에 총리 대행으로 임명했다. 그러면서 푸틴이 자신의 후계자라고 밝혔다. 푸틴은 다음해 대선에 출마하겠다고 밝혔다.

밀레니엄 전야인 19991231일 옐친은 사임을 발표했고, 푸틴은 대통령 대행으로 임명됐다. 옐친이 푸틴에게 자신의 남은 삶을 의탁한 조처였다. 권력 통제력을 잃은 옐친에게 남은 것은 자신의 부정부패와 무능으로 인한 감옥행이었다. 옐친은 자신의 사면과 보호를 푸틴에게 요구했고, 푸틴이 이를 받아들인 타협이 성사된 것이었다. 20003월 대선에서 승리한 푸틴은 먼저 옐친에게 그의 서류, 거주지, 다른 소유물을 수색과 압수로부터 보호하는 것을 포함한 형사적, 행정적 수사에 대한 면책권을 부여했다.

20002월 보리스 옐친 전 러시아 대통령의 사임으로 대통령 대행에 임명된 푸틴.

푸틴 권력의 세 열쇠, 체첸·올리가르흐·석유

집권한 푸틴에게 권력강화의 열쇠는 세 개였다. 체첸 전쟁, 소련 붕괴 이후 국가재산을 독식하는 과두재벌들인 올리가르흐(올리가키), 그리고 석유였다.

체첸 분리독립은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 영향권 축소의 상징이었다. 체첸은 또 러시아에게는 사활적인 지정학적 의미가 있는 곳이다. 체첸은 러시아의 남쪽 안보선인 캅카스(코카서스) 산맥에 위치했다. 또 이슬람권인 체첸의 분리독립은 러시아 내 이슬람 주민에 주는 파급력이 막대했다. 러시아 내의 이슬람주의 확산의 폭탄이기도 했다.

푸틴은 체첸 전쟁을 진압하며 러시아 안보와 자신의 권력을 다졌다. 그는 옐친처럼 물러터지지 않았다. 러시아의 군사력을 동원해 비타협적으로 체첸 전쟁을 수행했다. “행동하는 사람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푸틴의 총력전에 맞서, 체첸의 이슬람주의 군벌 지도자 모프사르 바라예프는 2002년 모스크바의 극장을 점거하고는 1천여명의 인질을 잡았다. 푸틴은 인질 129명을 희생시키며 이 사태를 진압했다. 재앙 수준의 진압이었다.

체첸 진압, 푸틴의 권력을 다지고 러 영향권 축소에 쐐기

푸틴에게는 결정적 순간이었다. 많은 이들이 푸틴의 지지가 폭락할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러시아 국민들은 열광했다. 사태가 진압되자, 되레 지지율이 83%로 폭등했다. 총리 취임 때 시작된 2차 체첸 전쟁은 2009년 공식 종료됐으나, 이 사태를 계기로 사실상 러시아의 승리로 굳어졌다.

체첸 분리독립 진압은 소련 붕괴 이후 진행되던 러시아 영향권 축소에 쐐기를 박는 신호였다. 러시아 지정학 사이클이 다시 팽창으로 선회하는 순간이었다. ‘대국향수에 젖어있던 러시아 국민들은 푸틴에 열광했다.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의 부패와 특권, 혼란의 상징이던 올리가르흐들에 대한 푸틴의 조처도 국민들의 지지와 자신의 권력을 다지는 길이었다. 올리가르흐들은 푸틴의 대통령 취임을 도왔다. 올리가르흐와 결탁했던 옐친이 후원한 푸틴이 계속 자신들을 옹호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 강력한 푸틴이 자신들에게는 더 도움이 될 것으로 예상했다.

착각이었다. 푸틴은 1990년대 러시아 올리가르흐의 상징인 거대 석유기업 유코스의 경영주인 미하일 호도르콥스키를 탈세로 투옥시켰다. 호도르콥스키는 푸틴에게 러시아의 부패 및 사업기회에 대해 자문했던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푸틴이 올리가르흐들을 일소한 것은 아니다. 국가권력 밑에 종속시켰다. 푸틴으로 상징되는 국가권력이 올리가르흐가 소유했던 모든 특권과 사업기회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푸틴의 권력이 배가된 것이다.

현대 러시아 흥망의 열쇠 석유, 푸틴의 러시아 부활

푸틴은 2004년 압도적으로 재선됐다. 그의 두 번 임기 동안 러시아 국내총생산(GDP)70%나 커졌다. 투자는 125% 늘었다. 비결은 석유였다. 첫 취임 때 배럴당 30달러를 밑돌던 석유값은 그가 두 번째 임기를 마치던 2008년쯤 150달러로 올랐다. 산유국인 러시아는 이 석유값 폭등 덕에 망가지던 경제를 복원했다.

석유는 러시아에게 2차대전 이후 흥망의 열쇠였다. 1970년대 초 오일쇼크로 석유값이 폭등했다. 당시 최대 산유국으로 올라섰던 소련은 석유값에 도취했다. 석유값이 폭등하자, 소련은 영향권 확장을 위해 제3세계 국가를 무리하게 원조하면서 개입을 확장했다. 미국 등 서방은 오일쇼크로 경제위기에 빠진 반면, 소련은 세력을 확장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석유값 폭등은 소련에게 독이 됐다. 1960년대 초부터 정체에 빠졌던 소련 경제는 혁신을 도외시하고는 에너지 투입 경제만 확장했다. 반면, 미국 등은 혁신을 통해 지식경제로 이행해갔다. 1980년대 중반 들어 석유값이 폭락하자, 무리하게 국력을 해외로 전개한 소련은 더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그 결과가 소련 붕괴였다. 오일쇼크는 소련에게 역사의 잔인한 속임수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소련을 붕괴시킨 석유가 이제는 푸틴의 러시아 부활의 연료로 바뀌었다.

두 번째 임기를 마치던 2008, 푸틴을 대체할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푸틴은 3선 제한에 걸렸다. 당시 43세의 젊은 제1부총리 드미트리 메드베데프가 후계자로 지명됐다. 그는 후계자가 아니라 푸틴이 조정하는 허수아비였다. 메드베데프는 대선에 당선된 다음날 푸틴을 총리로 지명했다. 총리가 대통령을 지휘하는 희한한 수렴청정이 시작됐다. 푸틴이 연방보안국 등 러시아의 모든 보안기구들을 한 손에 장악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조지아 전쟁과 크림반도, 푸틴 종신집권의 디딤돌

푸틴이 총리로 내려앉은 2008년 세계적인 금융위기가 발발했다. 러시아도 석유값 폭락으로 타격을 받았다. 국내의 점증하는 불만에 푸틴은 선제적으로 대응했다. 금융위기가 어른거리던 그해 8월 러시아는 전격적으로 분리독립한 조지아를 상대로 개전했다. 조지아로부터 분리독립하려던 남오세티야 및 압하지아를 지원하는 전쟁이었다. 5일간의 전쟁으로 러시아는 남오세티야 및 압하지아의 분리독립을 실현시키고는 자신의 영향권에 집어넣었다.

조지아 전쟁은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 지정학과 대외정책의 분수령이었다. 조지아가 나토 가입을 시도하자, 러시아는 미국에 경고하는 차원에서 전쟁을 벌였다. 나토의 확장과 동진을 통해 미국 등 서방이 옛 소련권으로 확장하는 것을 묵과하지 않겠다는 차원을 넘어, 공격적으로 반격하겠다는 신호였다. 미국 등 서방은 이 전쟁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조지아 전쟁은 러시아가 다시 팽창 사이클로 접어든 신호였다.

팽창 국면으로 들어간 러시아에게 강력한 전제군주는 필수사항이었다. 푸틴이 대통령으로 컴백하는 것은 예상이 아니라 필수사항이 됐다. 2012년 대선에 다시 출마한 푸틴은 앞서 두차례의 대선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저조한 64% 지지로 당선됐고, 부정선거 시비에 휘말렸다.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다. 조지아 전쟁으로 인한 서방의 제재는 계속되고, 미국과의 관계 개선도 실패로 돌아갔다.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은 푸틴에게는 종신집권으로 가는 디딤돌이었다. 지난 2019318일 크림반도의 군항 세바스토폴을 방문한 푸틴이 지역 주민과 퇴역군인들을 만나 악수하고 있다.

푸틴은 20143월 전 세계를 경악시킨 반전의 카드를 내밀었다. 군사력을 동원해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를 전격적으로 합병했다. 또 우크라이나 동부의 친러시아계 반군들의 분리운동을 지원해 우크라이나 내전을 촉발시켰다. 러시아 안보와 자신의 권력을 일체화시키는 푸틴 특유의 통치술이었다.

우크라이나에서 유럽연합 가입을 찬성하는 시민들이 친러 정부를 타도하자, 러시아로서는 행동에 나설 수 밖에 없었다. 이 사태를 묵과하면, 우크라이나가 나토까지 가입하게 되는 수순이 된다. 이는 서방의 칼이 러시아의 목을 찌르는 형국이다.

크림반도 합병과 우크라이나 내전으로 러시아는 다시 우크라이나의 목줄을 쥐었고, 푸틴의 지지율은 80%대로 치솟았다. 크림반도는 푸틴의 종신집권으로 가는 디딤돌이었다.

푸틴 권력의 토대인 러시아 팽창주의 지정학

푸틴이 종신집권 개헌까지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러시아에 내재된 팽창주의를 그가 적당히 충족시켰기 때문이다. 미국의 푸들이었던 전임자 옐친과는 달리 미국과 맞서고, 소실했던 소련의 영향권을 일부 회복하는 성과를 거뒀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그의 권력은 공고화됐다. 중국과의 관계회복과 강화가 결정적이었다.

소련 시절 중-소 분쟁에 이은 미-중의 반소연대는 소련 붕괴에 결정적이었다. 그런 중국이 푸틴의 집권과 동시에 러시아와 관계 회복에 적극적이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중 대결이 가시화되면서, 중국과 러시아의 전략적 관계가 형성됐다.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합병한 2014년 이후 러시아의 석유와 가스를 중국에 안정적으로 공급하는 대형 계약들이 체결됐다. 러시아는 돈줄을, 중국은 에너지를 서로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윈윈게임이었다.

미국은 버락 오바마에 이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러시아와의 관계개선을 표방했으나, 갈수록 악화되는 상황에 처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두 나라의 전략적 이해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미국은 러시아의 내재된 팽창주의를 용인할 수 없다. 러시아는 미국의 인정 여부와 상관없이 팽창주의를 추구할 수 밖에 없다.

물론 푸틴의 러시아가 보여주는 팽창주의는 본질적으로 허세다. 러시아의 역사적인 팽창주의는 언제나 내부 모순과 불안을 키우며 붕괴됐다. 현대 러시아 흥망의 열쇠인 석유값도 코로나19로 역사적인 하강국면으로 접어드는 신호를 보인다.

하지만 푸틴의 러시아가 주변 상황으로 인해 허세적인 팽창을 계속 요구받는 상황에 직면한다면, 푸틴의 권력도 그만큼 연장되고 유지될 것이다. < 정의길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