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한마당] 트럼프 씨, 이제 그만!
트럼프 대통령이 ‘큰바위 얼굴’로 널리 알려진 미국 사우스 다코타 주의 러시모어 산 거대 얼굴상에 자신의 두상을 추가하는 방안을 검토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원주민들이 신성한 산으로 여겼다는 러시모아산 얼굴상은 미국의 위인들로 추앙받는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에이브러햄 링컨, 시어도어 루스벨트 등 4명의 전직 대통령 얼굴이 새겨져 있다. 거기에 자신의 얼굴을 넣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2018년 사우스 다코타의 크리스티 놈 주지사는 한 인터뷰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처음 만났을 때 "러시모어산에 내 얼굴이 새겨지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다고 밝혔다. 놈 지사는 그 말이 농담인 줄 알고 웃고 말았는데, 트럼프는 정말로 진지하게 말하더라는 것이다.
그 뒤 백악관의 한 참모가 주지사실에 전화해서 연방 국립공원인 러시모어 산에 다른 대통령들을 추가하는 절차가 어떻게 되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는 뉴욕타임즈 보도를 보면, ‘감히’ 자기 얼굴을 새겨넣고 싶다는 트럼프의 ‘허욕’은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의 말을 듣고 주지사가 웃었다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큰바위 얼굴의 반열에 들어가고 싶다는 트럼프의 꿈이 허망한 욕심인 것은 구태여 설명이 필요 없으리라고 본다.
소설가 나다니엘 호손의 ‘큰바위 얼굴’(Great Stone Face)은 중학교 교과서에도 실린 유명한 이야기다. 나중에 큰바위 얼굴로 거듭난 주인공 이름이 ‘어니스트(Honest)’다. 정직과 성실 등의 고매한 인품을 표현한다.
러시모어 산에 새겨진 인물들이 정직하고 성실했는지는 살펴봐야 하겠지만, 미국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이들인 것은 사실이다. 그들도 성인(聖人)은 아닌 이상 완벽할 수는 없었겠으나, 미국사회나 세계사에 나쁜 영향 보다는 헌신과 진보의 발자취를 남긴 것으로 여겨지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들은 현직에 있을 때 자기 얼굴을 새겨 남기려 하지도 않았고, 특히 트럼프 처럼 뻔뻔하게 이기적인 언행으로 세상을 뒤흔들었다는 뒷말도 안들린다.
그런데, 우리가 지난 3년여 동안 보고 듣고 느낀 트럼프는 어떤 인물인가. 소설 큰바위 얼굴에 나오는 재력가 개더 골드(Gather Gold)나 사업가 스캐터 코퍼(Scatter Copper), 전쟁 영웅이라는 올드블러드 앤드 썬더(Old Blood And Thunder) 같은 인물들을 뒤섞어 놓은 듯, 위선과 허풍과 자기과시에 빠진 ‘동키호테’식 인물이라면 과한 혹평인가. 그의 조카가 오죽하면 ‘사이코’ 라고 책에서 까발렸을까만.
트럼프가 대통령에 오른 이후 미국 제일주의라며 외쳐대고 행한 일들은, 거의 깨뜨리고, 갈라치고, 선동으로 깔아뭉개는 일들로 사람들에게 각인되지 않았나 싶다. 맨 먼저 기후협약을 무력화시켜 지구를 살리자는 인류의 약속과 호소를 외면했다. 이란과의 핵합의를 파기해 중동을 위기에 몰아넣더니 NATO와 EU와의 전통적 협력을 무시해 반발을 샀고, 핵무기 감축을 약속한 러시아와의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 연장을 회피했다. 세계 무역질서를 깨뜨리고 WTO(세계무역기구) 등 국제기구들도 뒤흔들며 중국과 무역전쟁으로 세계경제에 파장을 불렀다. 최근엔 코로나 창궐 와중에 애꿎은 세계보건기구(WHO)에 화풀이를 하며 탈퇴를 선언했다.
적극적인 북한과의 대화로 우리에게 희망을 부르기는 했으나, ‘시진핑, 아베와 함께 김정은을 좋아한다’는 속내를 드러낸 그의 대북협상은 노벨상을 노린 제스추어가 아니었는지, 냉철히 살펴 볼 일이 됐다. 멀쩡한 FTA(자유무역협정) 재협상을 강요하고 천문학적인 방위비를 요구하는 동맹무시의 행동 역시 우리에게는 엄청난 스트레스다.
미국의 일부 백인들은 환호한다지만, 그것은 세계 최강이었던 미국의 쇠락과 민주주의 선진국의 모델적 위상을 포기한 역설과 강변에 다름 아니다. 무엇보다 그가 끼친 나쁜 영향은 전세계로 파급돼 사람들의 도덕과 윤리, 가치관 마저 타락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취임 후 3년6개월 간 무려 2만 번에 달한다는 거짓말의 달인인 그의 등장과 함께 가짜뉴스가 지구촌의 유행어가 됐다. 인종과 빈부, 지역, 그리고 이민자를 차별하는 발언과 정책들로 인해 미국은 물론 세계 곳곳에서 갈등과 분열과 대립과 헐뜯기의 심화가 ‘부채질 당하는’ 형국이다.
일부 보수적 종교인들이 그의 신앙적 행동을 평가하며 지지를 표하지만, 오인도 지나친 것이다. 가령 기독교라면 사랑과 화평과 긍휼과 용서 등이 그리스도 정신 일진대, 어느 하나 어울리는 덕목을 찾을 수 없다. 어쩌면 그에게 고매한 인품이나 지도자의 덕목 운운하는 것은 우스울 뿐더러, 격에도 맞지않는 사치로 들린다.
11.3 대선이 어찌될지 모르지만, 사람들에게 스트레스와 상처를 주는 트럼프의 기행과 허욕은 단 한번의 임기로도 과하지 않을까. 거의 매일 그의 뉴스를 봐야하는 입장에서는 이제 제발 무대를 떠나 주면 좋을 것 같다.
< 김종천 편집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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