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세상을 떠났다. 그는 우리 현대사의 암흑기에 온몸으로 군부독재와 맞서 싸우고 민주주의를 일궈낸 투사였다. 그는 어려운 이웃과의 연대를 향한 열정을 한순간도 꺾지 않았다. 그는 곧 우리 사회 민주화와 희망의 뿌리였다. 
김근태 고문은 1967년 대학 재학 중 시위를 주도하면서 민주화투쟁을 시작했다. 이어 노동운동에 참여했고 전두환 정권의 폭압통치가 절정에 이른 1983년에 민주화운동청년연합을 결성해 의장을 맡았다. 어느 시기이든 반독재 투쟁의 선두에는 늘 그가 있었다. 그는 1950년대 영국의 한 언론인이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이뤄진다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는 것”이라고 한 말에 강한 모멸감을 느꼈다고 했다. 폭력으로 억압한다고 복종해버린다면 우리 모두가 패배자가 될 것임을 늘 경계했다.

전두환 정권은 그를 체포해 모진 고문을 가했다. 64살의 많지 않은 나이에 숨을 거둔 것도 독재정권의 고문 탓이 크다. 그러나 그는 인간성을 송두리째 파괴하려는 고문에 굴복하지 않았다. 정면으로 고문을 폭로하고 나섰다. 뒷날 케네디 인권상을 받았고 세계의 양심수로도 선정되었다. 민주주의와 인권 회복을 위해 온몸을 던져 저항하는 게 얼마나 어렵고 소중한가를 평가한 결과였다. 
정치인으로서 김근태는 많은 대중적 인기를 얻지는 못했다. 권력정치나 세인의 눈과 귀를 사로잡는 공학적 기술에 능한 편이 못 됐기 때문이다. 심지어 너무 진지해서 탈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대신에 그는 정치개혁을 위해 과감하게 행동했다. 정치권에서 그는 진정성의 정치를 실천한 몇 안 되는 존재였다. 
생전의 그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후배들이 ‘근태형’ ‘근태 형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정중하고 진지하게 후배들의 말을 경청했고 후배들한테도 존댓말을 썼다. 그는 ‘인간에 대한 예의를 아는 사람’이 되고자 늘 삼가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일상생활에서도 민주주의를 몸으로 실천했던 것이다.
 
현 정부 들어 민주주의의 퇴행이 심각하다. 민주화운동의 성과로 자리잡게 된 제도와 가치관을 무너뜨리려는 시도들이 만만찮다. 너무나 일찍 우리 곁을 떠난 김근태가 그래서 더욱 그립다. 그동안 무겁게 짊어지고 왔던 민주화운동의 짐을 내려놓고 부디 편안히 잠드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