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란물 잡지 <허슬러> 발행인…표현의 자유 논란 불러, 대법원서 승소

재판 때 피격 장애… ‘표현 자유 최고 옹호자’ Vs ’악명높은 음란물업자’

 

<허슬러> 발행인 래리 플린트가 지난 1987년 12월3일 워싱턴 연방대법원에서 열린 자신과 관련된 소송을 마친 뒤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 AP 연합뉴스

 

미국에서 가장 격렬한 표현의 자유 논쟁을 불붙인 포르노 잡지 발행인 래리 플린트가 10일 78세 나이로 사망했다.

포르노 잡지 <허슬러> 발행 등으로 유명한 플린트는 이날 아침 로스앤젤레스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고 그의 동생 지미 플린트가 밝혔다.

플린트는 자신이 발행한 <허슬러> 등 포르노 잡지를 놓고 법원에서 격렬한 표현의 자유 논쟁을 벌였고, 이때문에 저격을 당해 평생 휠체어에 의지했다. 그는 포르노 잡지를 발행하는 자신과 같은 사람도 표현의 자유를 보장받겠 된다면, 표현의 자유는 공고해질 것이라는 주장으로 유명해졌다. 그는 자신을 ’의식있는 음란물 행상’이라고 표현했다.

플린트는 1974년 <허슬러>를 발행하기 시작해, 단번에 논쟁적인 인물로 떠올랐다. <허슬러>에 실린 사진이나 내용은 성행위와 성기를 노골적으로 강조하는 하드코어 포르노 표현물이었다. 당시까지 공식적으로 발행되는 기존의 포르노 잡지는 여성의 나체 사진정도만 게재하는 수준이었다.

<허슬러>가 발행된 이후 수없는 소송에 휘말리기 시작했다. 특히, 그는 1978년 재판을 마치고 법원을 나서다가 저격을 당해, 양쪽 하지가 마비되는 영구 장애를 입었다. 그는 금박으로 장식된 휠체어를 사용하며, 자신의 장애에 맞서는 모습을 보여줬다.

플린트를 저격한 인물은 기소되지 않았다. 하지만 범인은 2013년 다른 살인사건 등으로 사형당했다. 플린트는 그에 대한 사형 집행을 반대하기도 했다.

<허슬러>는 최고 300만부까지 팔리는 등 1970년대말에는 평균 200만부가 팔리는 인기 잡지로 부상했다.

그를 둘러싼 법적 분쟁은 1983년 <허슬러>에 실린 당시 유명 텔레비전 복음전도사 제리 폴웰에 대한 만평으로 절정에 올랐다. 문제의 만평은 폴웰이 옥외화장실에서 엄마와 첫번째 성적 경험을 했다고 말하는 패러디였다.

폴웰은 즉각 명예훼손으로 소송을 걸어서 1심에서 500만달러를 배상금으로 받아내는 승소를 했다. 이 사건은 연방대법원까지 올라간 끝에, 8 대 0으로 이 만평이 표현의 자유에 따른 풍자라고 판결했다. 이 사건은 표현의 자유 논쟁에서 중요한 분기점이 됐다.

 

래리 플린트가 지난 2008년 할리우드의 한 극장에서 자신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에서 자신으로 분한 배우 우디 해럴슨과 재회했다. AFP 연합뉴스

 

플린트는 이 재판 과정에서 “자신과 같은 음란물 보따리 행상도 표현의 자유를 보장받는다면, 표현의 자유가 모두를 위해 공고해질 것이다’라는 유명한 논지를 폈다.

켄터기 시골에서 태어난 그는 중학교를 중퇴한 학력으로 거리에서 행상으로 시작해, 1억달러의 포르노 제국을 건설했다. <허슬러> 잡지뿐만 아니라 로스앤젤레스 교외의 화려한 카지노, 성기구 온라인 업체 등을 꾸려왔다.

그는 지금도 ’표현의 자유의 최고 옹호자’와 ’악명높은 음란물업자’라는 양극단의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일대기를 담은 영화가 1996년에 우디 해럴슨 주연으로 제작되기도 했다. 정의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