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머니에 단돈 5천원…‘법정 안팎의 의인’ 백기완

 [ 한승헌 변호사의 추모 글 ]

 

21일 오전 경기도 남양주시 모란공원에서 열린 고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삼우제에서 유족들이 절을 하고 있다. 남양주/연합뉴스

 

고인이 되신 백기완 선생이 겪은 수난 내지 박해엔 법정이라는, 일반에 알려지지 않은 특수 공간을 빼놓을 수 없다. 따라서 변호인인 나는 증언자의 소임까지도 염두에 두어야 할 때가 있다.

박정희의 폭주가 끝날 줄 모르자 대학가 반정부 시위가 격화됐고, 1973년 12월엔 마침내 함석헌·윤보선 등 지도급 인사를 망라한 ‘개헌청원운동본부’가 장준하, 백기완의 주도 아래 ‘유신헌법 폐지 100만인 서명운동’에 돌입했다.

박 정권이 최악의 위기를 벗어나려는 대증요법으로 긴급히 내놓은 조치가 ‘대통령 긴급조치 제1호’였다. 초법적인 엄벌 위협에도 불구하고 반유신 개헌운동은 그야말로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에 번져나갔다. 그리고 긴급조치 1호 위반 첫 사건의 주인공이 등장했다. <사상계> 주간과 국회의원을 역임한 장준하(58), 그리고 통일운동가이자 백범사상연구소장이던 백기완(42), 이 두 사람이 긴급조치 재판극의 첫 배역으로 끌려가게 된 것이다. 긴급조치(긴조) 사건은 일반법원이 아닌 비상보통군법회의가 1심, 비상고등군법회의가 2심, 대법원이 최종심이었다. 이름부터 ‘비상’이 ‘보통’에 얹혀 있으니 피차에 어리둥절했다.

나는 백기완 선생의 변호인이 되었다. 장준하, 백기완 두 사람은 긴조 1호가 나온 지 5일 만에 중앙정보부로 연행 구속되어 12일 만에 기소, 6일 뒤 첫 공판, 바로 다음날 판결 선고 식으로 초고속 질주로 1라운드가 끝났다. 서울 삼각지 국방부 청사 근처 언덕바지에 있는 군용 퀀셋 안에서 비상보통군법회의가 열렸다.

그런데 정작 공소장에는 헌법개정청원운동본부를 결성하고 100만인 서명운동에 들어간 행위는 이른바 모두(冒頭)사실, 즉 처벌 대상인 ‘범죄사실’이 아니라 그 전 단계의 경과사실로 기재되어 있었다. 긴급조치가 발표된 1월8일 이전의 일이었기 때문에 ‘소급적용’을 하지 않았다는 몰골로 보였다. 그러다 보니 막상 공소사실에는 긴급조치를 비난하는 말 몇 마디만 남게 되었다. 예컨대, “국민이 대통령에게 개헌청원도 못한단 말인가” “개헌이란 ‘개’ 자만 말해도 잡혀가게 되어 있으니, 이런 놈의 나라가 어디 있느냐”라는 등의 말을 함으로써 대통령 긴급조치를 비방하고(장준하), 또는 “이런 조치는 대통령이 더 오래 해먹겠다는 이야기니 나는 15년 징역을 살고 나오면 백기완 옹이 되겠구나”라는 말을 함으로써 대통령 긴급조치를 비방하고(백기완)…, 이런 식으로 되어 있어서 자못 희극적이었다. 긴급조치 1호에는 유신헌법 비방뿐 아니라 ‘이 조치를 비방하는 자’ 역시 긴조 위반으로 처벌한다는 조항이 있었던 것이다. 그 저인망식 표현에 냉소를 금할 수가 없었다.

변호인인 나와 백기완 선생 사이에는 이런 법정 문답도 오갔다.

변호인(변): 이번에 중앙정보부에 잡혀가서 조사를 받을 때에 주머니에서 나온 돈이라고는 단돈 5000원뿐이었다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백기완(백): 예, 딱 5000원밖에 없었습니다.

변: 그동안 전국민적인 개헌운동을 주도해오시면서 상당한 자금이 필요했을 터인데요?

백: 아닙니다. 민주주의와 통일을 열망하는 엄청난 민심이 바로 우리들의 자금이요, 힘이었으니까요.

내가 그런 질문을 한 데는 개헌운동에 대한 국민적 공감과 백 선생의 헌신을 부각시키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당사자인 백 선생도 그때를 회고하는 글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어찌해서 그 많은 변호사 반대신문과 변론 요지를 빼고 굳이 이 대목을 상기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이 대목에서 한승헌 변호사의 날카롭고 당당한 백기완 변론의 알짜가 살아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반박정희 기류와 온 민중의 염원이 객관화된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라고도 했다.

그런데 역시 중정에 끌려온 장준하 선생의 호주머니에서는 단돈 180원이 나왔다. 담배 한 갑 값도 안 되는 푼돈이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1월31일 첫 공판에서 군 검찰관은 두 피고인에게 각 징역 15년과 자격정지 15년을 구형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날(2월1일) 재판부는 전날의 검찰관 구형과 똑같은 15년형을 두 사람에게 선고했다. 나는 두고두고 말했다. “대한민국의 정찰제는 대도시의 백화점에서 확립된 것이 아니라, 서울 삼각지의 군용 퀀셋 안에서 군법회의 판결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난 것이다.” 참으로 어이없고 부끄러운 ‘판결’이었다.

이게 ‘개판’이지 무슨 재판이냐고 분개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어디까지나 군법회의니까, 다시 말해서 회의 결과에 불과하니까 그리 알고 넘어갑시다.” 내 그런 말을 듣고 바뀐 것은 아니겠지만, 그 뒤 ‘군사법원’이라고 개명을 해서 지금은 ‘회의’ 소리는 면했는지 모르겠다. 이 사건은 대법원에서도 상고 기각으로 끝났다. 박 정권이 긴급조치 1호를 발동해, 법률로도 할 수 없는 짓을 대통령 명령 하나로 15년 징역을 먹이는 판이었으니, 황당하면서도 만만치 않은 공포 분위기가 넘쳐나고 있었다.

그렇다고 명색이 변호사인 제가 ‘정찰제’ 타령이나 하고 저 할 일 다 한 듯이 알고 살아온 것은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백 선생님! 

한승헌 변호사

 

‘손에 물 묻힌 투사’ 백기완, 막내딸 업고 저녁밥 짓던 일상

 ~ 작가 공지영, 어릴 적부터 지켜본 백기완 선생 영전에 부쳐 ~

 

창경궁, 늙고 마른 백기완, “이 발길로 고향 어머니 무덤에 한번 가보고 싶어...” 사진 채원희

 

고문당하고 81㎏ 몸이 38㎏ 되도록 만신창이가 되어도, 그는 비굴하지도 상처에 찌들어 비뚤어지지도 않았다.

나는 위대한 일을 하고 있으니 너희가 나를 대접해야 한다, 라는 역겨운 가식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아내는 그의 동지였고 그런 대우를 받았다.

 

한 인간을 추억한다는 것은 밤하늘의 별을 다 살피는 일만큼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열 권의 책을 쓴다 한들 그의 인생을 다 묘사해내지는 못하리라. 혹자는 그를 통일운동가로, 혹자는 그를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던 정치가로 부르고, 혹자는 온갖 말로 그를 가리켜 폄하도 할 테지만, 나는 그를 말과 행함에 있어 아주 작은 괴리라도 용납하려 하지 않았던 한 진실한 인간, ‘새내기’ ‘동아리’ 같은 말을 우리에게 새로 일깨워준 작가 혹은 시인으로 기억하고 싶다.

 

딸들의 도시락을 챙겼던 그

 

그의 부고를 듣고 수많은 생각이 나를 스쳐 지나갔다. 내 인생의 많은 곳에도 그가 있었다. 어린 시절 읽었던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라는 그의 책부터 1987년과 1992년 대통령선거, 쌍용자동차 등 모든 해고자의 눈물 속까지. 나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의 마음속에 어떤 장소, 어떤 순간 속에 그가 있었음이 스쳐 지나갔으리라. 그는 그렇게 어디에나 있었다. 만일 거기 의로운 분노가 있고 가난한 눈물이 있었다면 말이다. 만일 거기 더러운 억압이 있고 최루탄과 짓밟힘이 있었다면 말이다.

하지만 내게 가장 뚜렷하게 떠오르는 건 조금은 다른 것이었다. 나는 대학 시절 그의 큰딸인 백원담 교수(성공회대)와 학교 선후배라는 인연으로 그의 집에 방문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어렸던 나는 그가 설거지하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학교에 강사로 오면 구름떼같이 모인 학생들의 환호성에 휩싸인 주인공이던 그가, 거구에서 나오는 우렁찬 목소리로 포효하며 10만 명 넘게 운집한 광장의 젊은이들을 움직이게 하던 그가, 두레상에 앉아 겸손한 식사를 마치며 당연하다는 듯이 그릇을 들고 설거지했다. 초등학교 선생님으로서 평생 집안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아내의 노고를 돕기 위해, 그는 언제나 막내딸을 둘러업고 저녁밥을 하고 내일 가져갈 딸들의 도시락을 챙겼다. 그러는 동안에도 엄마가 보고 싶은 딸들에게 우리의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그런 아빠였다. 그 집안에서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의례 같았다.

이른바 ‘민주화 투사’라는 사람들이 여자 문제를 일으키던 때, 나랏일은 남자의 것이고 집안일은 여자나 하던 것이라는 봉건이 아직도 짙었던 그때, 페미니즘에 겨우 눈뜨던 내게 그 모습이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 더구나 그는 이미 그 직전인 박정희·전두환 독재정권의 개들에게 끌려가 고문당하고 81㎏의 몸이 38㎏ 되도록 만신창이가 되어, 던져지듯 집으로 돌아와 겨우 회복한 터였다. 모두 가망이 없다는 죽음의 세월에서 그는 다시 살아났으나 이후에도 투옥과 고문, 가택연금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비굴하지도 상처에 찌들어 비뚤어지지도 않았다. 나는 위대한 일을 하고 있으니 너희가 나를 대접해야 한다, 라는 역겨운 가식 같은 건 눈을 씻고 봐도 보이지 않았다. 아내는 그의 동지였고 그런 대우를 받았다. 그가 한 번도 그녀를 배반한 일이 없다는 당연한 일이 역사에서 얼마나 드문지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1992년 겨울 민주화를 이루기 위해 민중후보로서 대통령선거에 나섰을 때, 그의 대선 캠프에서 내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때 나는 1500㏄ 소형차를 그 캠프에 줬고 그는 그것을 전용차로 썼다. 당시 이름 없던 소설가가 가진 차를 차출해 전용차로 써야 할 만큼 가난한 대선 캠프. 몇 년 전 방한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소형차를 타는 것을 보고 감동받은 사람들이 그랬듯, 당시 내게 그것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 신선한 충격이 얼마나 많은 청년의 정수리에 희망을 들이부었던지. 변두리 집에서 나는 자동차를 빌려주고 발이 묶여 하는 수 없이(?) 책상 앞에 앉아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를 썼으니 그게 거의 30년 전 일이다. 세월은 덧없이 날아가고 우리네 인생은 아침 풀잎에 맺힌 이슬만큼 허망하게 스러지는 듯하다. 

 

모든 가여운 이들을 위해 애썼던 그

 

꽃이 질 때마다 울 수는 없는 일이겠지. 그러나 그 꽃 아래서 우리가 했던 약속을 기억하는 건 좋은 일이리라. 그 꽃 아래서 불렀던 노래를 다시 부르고 하늘을 우러르던 빛나는 눈동자를 기억하는 것도 좋은 일이리라.

오, 신이시여 부디 고단했던 그의 영혼을 안아주소서. 축구화를 사고 싶어 황해도에서 서울로 내려왔던 어린 소년이 그날로 막힌 삼팔선 때문에 고향으로 다시는 돌아가지 못했음을 기억하소서. 그 상처의 힘으로 다른 모든 가여운 이들을 위해 애썼음을 헤아려주소서.

그는 가고, 남은 우리는 여기서 그가 남긴 노래를 천천히 부르겠나이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공지영 소설가

 

*백기완 선생이 1980년 서대문형무소에 갇혀 있으면서 쓴 시 ‘묏비나리’에 나오는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등의 구절은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에 차용됐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지금도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노래로 집회 현장에서 널리 불리고 있다. 

 

'민중과 노동자들의 벗'  백기완, 전태일 묘소 옆에 영면

시민들 마지막 가는 길 배웅 “민중의 친구로 산 삶 기억”

 

고 백기완 선생의 영결식이 열린 19일 오후 경기도 남양주시 모란공원묘지에서 유가독들과 시민 노동자들이 참여한 가운데 하관식 및 평토제를 하고 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19일 오후 경기도 남양주시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임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 퍼졌다. 상여꾼들이 천천히 ‘민중의 벗’이었던 백기완 선생(통일문제연구소 소장)의 관을 전태일 열사 묘소 왼편 장지에 내려놓았다. 백 선생의 딸 백원담 성공회대 교수 등 유족들은 “아빠”를 부르며 하염없이 통곡했다. 백 선생의 하관식에 참석한 200여명의 시민들이 북소리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백 선생의 머리맡에는 ‘한반도기’와 함께 영정사진과 위패가 놓였다. 영정사진 속의 백 선생은 여전히 백발을 휘날리며 환히 웃고 있었다. 평생 관직에 나가지 않았던 백 선생의 위패에는 ‘현고학생부군신위’가 적혔다.

백 선생의 큰아들 백일씨가 “아버지 흙 들어가오. 안녕히 가세요”라고 외친 뒤 삽으로 흙을 떠 흩뿌렸다. 관을 흙으로 덮는 허토가 진행되는 동안 풍물패의 연주가 이어졌고,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활동가의 자녀들이 선생에게 쓴 편지도 관 위에 놓여 함께 묻혔다. 선생이 50년 전 노동해방을 외치며 먼저 떠난 전태일 열사와 나란히 누워 영면에 드는 순간이었다.

19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고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의 영결식이 열리면서 참가자들이 무대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늘 노동자와 민중의 편에 섰던 백 선생은 마지막 길에도 그들과 함께였다. 백 선생과 함께 통일과 민주화를 외쳤던 동지들, 백 선생이 손잡고 격려해준 수많은 노동자와 ‘백기완 정신’을 기억하려는 시민들이 백 선생의 마지막을 배웅했다. 백 선생의 노제와 영결식, 하관식이 예정된 이날 오전 8시께부터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엔 100명이 넘는 조문객이 몰렸다.

‘노나메기 세상 백기완 선생 장례위원회’(장례위)는 발인이 끝난 뒤 오전 8시 반께 백 선생이 생전에 몸담았던 종로구 통일문제연구소 앞과 대학로 소나무길에서 노제를 열었다. 상임장례위원장을 맡은 김세균 서울대 명예교수는 노제에서 “선생님은 평생을 이 땅의 노동자, 민중의 일원으로 살았고 백발이 노인이 된 뒤에도 그들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동지로 살았다”며 “선생님은 투쟁의 최전선에서 한 걸음의 진전을 위한 싸움에도 자신의 목숨을 건 투사였다”고 회고했다.

노제가 끝난 뒤 운구행렬에는 백 선생을 형상화한 대형 한지 인형과 꽃상여가 백 선생의 영정을 뒤따랐다. 운구행렬에 동참한 시민 300여명은 왼쪽 가슴에 ‘남김없이’라고 쓰인 하얀 리본을 달았고, ‘노나메기 세상’(너도 나도 일하고 올바르게 잘 사는 세상)이 적힌 하얀 마스크를 썼다. 노동자들은 백 선생이 마지막으로 남긴 글귀 ‘노동해방’이 적힌 검은 머리띠를 둘렀다. 곳곳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함께 부르며 울먹이는 시민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노동자와 시민들은 ‘딱 한 발 떼기에 목숨을 걸어라’ 등 생전 고인의 글귀를 적은 손팻말을 든 채 마지막 행진을 했다. 행렬에 참여한 이미연(51)씨는 “옳은 말을 하는 사람은 많지만 백 선생님은 옳은 말을 삶으로 온전히 실천하는 분이었다”며 “많은 이들이 선생님의 뜻을 이어나가길 바란다”고 말했다.

오전 11시 반부터 서울시청 광장에서 진행된 영결식에선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이 선생을 떠올리며 조사를 했다. “백 선생님이 걸음걸이도 힘든 상태에서 양쪽 부축을 받으며 겨우 (용균이) 빈소에 와 절을 하는 모습을 보고 원통함과 북받치는 설움을 느꼈습니다. 저세상의 용균이를 만나면 너무 힘들어하지 말고, 꼭 한번만 안아주세요.” 백 선생의 오랜 동지인 문정현 신부도 조사를 낭독하는 내내 울먹이면서 “용산참사, 세월호 등 이 시대의 노동자와 농민, 빈민의 편에 서서 선생님이 보여준 노나메기 세상에 대한 말씀 길이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강재구 기자

 

‘민중운동 큰 어른’ 백기완 88세로 별세

문 대통령, 빈소 조문하고 유족들 위로

 

백기완 선생 빈소 들어서는 문재인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이 17일 오전 고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빈소를 조문하기 위해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17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故)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빈소를 조문했다.

문 대통령은 빈소에서 고인을 추모한 뒤 유족들을 만나 위로했다.

문 대통령이 직접 빈소를 찾은 것은 2019년 1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고 김복동 할머니를 조문한 이후 2년 만이다.

2019년 6월에는 북유럽 3개국 순방 도중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고 이희호 여사가 별세하자, 귀국 직후 동교동 사저를 방문해 유족들을 위로한 바 있다.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17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빈소를 조문한 뒤 빈소를 나서고 있다.

 

평생 반독재 민주화와 통일운동 헌신

문인 활동도…임을 위한 행진곡 작사

 

1992년, 시위 도중 백골단의 구타에 숨진 명지대생 강경대 열사 1주기 추모식. 민족사진연구회 제공

 

내 살아온 꼴은 한마디로 땅불쑥해.

땅이 평평하지 않고 툭툭 튀어나온 꼴이니, 특이하다 말이지.

그 큰 줄기를 뽑아보니 통일 싸움꾼이 하나요, 이야기꾼이 둘이야.

그래서 그 특이한 내력을 남겨볼라 그래!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15일 오전 별세했다. 향년 88. 유족으로는 부인 김정숙씨와 딸 백원담(성공회대 중어중국학과 교수)·백미담·백현담, 아들 백일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호실에 마련됐다. 발인은 19일 오전 7시, 장지는 모란공원이다.

1933년 1월 24일 황해도 은율 구월산 밑자락에서 태어난 백 소장은 1945년 해방 뒤 아버지를 따라 황해도에서 서울로 내려왔다. 해방 이후 한반도가 분단되면서 백 소장 가족도 남북으로 나뉘어 살게 됐고, 갈라진 집안을 잇겠다는 일념으로 통일운동을 시작했다. 유년시절 그는 초등학교만 다니고 혼자 공부했음에도 시와 소설 등 문학작품을 읽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고 한다. ‘해외유학장려회’ 첫 수혜자로 해외 유학을 권유받았지만 “조국을 두고 혼자 유학을 갈 수 없다”며 거절했다.

 

                                          여든다섯 살의 백기완 통일문제연구 소장. 정택용 작가 

1952년부터 10여년 동안 문맹 퇴치를 위한 야학을 운영했고, 도시빈민운동, 나무심기운동, 농민운동에 몸담았다. 1957년엔 평생동지였던 김정숙 여사와 부부의 연을 맺었다. 1960년 4.19 혁명 운동에 뛰어들면서 본격적으로 민주화·통일운동을 시작했다. 1964년에는 한일협정에 반대하며 함석헌, 장준하 선생 등과 반일 투쟁에 나섰다가 투옥되기도 했다.

1966년엔 박정희 유신독재에 반대하며 반독재 운동을 전개했다. 1974년에는 유신 반대를 위한 1백만인 서명운동을 주도하다 긴급조치 위반 혐의를 받고 장준하 선생과 함께 구속됐다.

1979년 ‘명동 YMCA 위장결혼 사건’과 1986년 ‘부천 권인숙 성고문 진상 폭로 대회’를 주도한 혐의로도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1980년 옥중에서 광주 민주화 운동 소식을 들은 백 소장은 옥고를 치르면서도 반독재·민주화 운동의 중요성을 호소했다. 1987년에는 학생·노동자·민중의 요구를 받아 독자 민중후보로 대통령선거에 출마했지만 김영삼·김대중 후보의 단일화를 호소하며 사퇴했다. 1992년 다시 독자 민중후보로 대선에 출마했다. 낙선 뒤 그는 민중 운동에 매진했다.

 

2016년 문화계 블랙리스트 진상규명과 노동자생존권을 요구하며 차려진 광화문캠핑촌에서 예술 노동자들과 함께한 백 소장. 통일문제연구소 제공

이후 이라크 파병 반대 집회(2003년), 용산참사 투쟁(2009년), 세월호 진상규명 집회·국정원 댓글 사건 규탄 시국회의(2014년), 백남기 농민 사망 투쟁(2015년), 박근혜 탄핵 촛불 집회(2016∼2017년) 등 진보진영의 투쟁 현장의 맨 앞자리를 지켰다. ‘장산곶매 이야기’ 등 소설과 여러권의 수필집·시집을 낸 문인으로도 유명한 백 소장은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의 가사 원작자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지난해 1월부터 폐렴 증상으로 입원해 투병생활을 해왔던 백 소장은 심장질환 등으로 수술과 병원 치료를 받아오다 15일 오전 4시께 영면에 들었다.  이재호 기자


불끈 쥔 주먹…‘백기완 정신’ 담은 사진 놓인 빈소

딸 백원담 교수 추모 글…고인 정신 따라 조화사양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15일 투병 끝에 별세했다. 향년 89세. 1932년 황해도 은율군 장련면 동부리에서 태어난 그는 1950년대부터 농민·빈 민·통일·민주화운동에 매진하며 한국 사회운동 전반에 참여했다. 15일 오전 빈소가 마련된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 고인의 영정이 놓여있다. 연합뉴스

 

“선생님이 생전에 외쳤던 정신을 기억하자는 취지입니다.”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호실에 마련된 고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빈소에는 영정 사진 외에도 대형 흑백 사진 2장이 함께 놓였다. 민중운동의 큰 어른이었던 백 소장은 지난해 1월부터 폐렴 증상으로 투병생활을 해오다 15일 오전 4시께 세상을 떠났다.

빈소에 사진을 놓은 노승택 사진작가는 “추모의 의미도 있지만 장례의 엄숙함을 강조하기보다는 백기완 선생이 살아생전 무엇을 외쳤는지 기억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에 불끈 쥔 주먹과 양팔을 펼친 모습을 준비했다”고 말했다.

이날 빈소에는 생전 고인의 뜻에 따라 근조기와 근조 화환도 놓이지 않았다.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이재명 경기도지사 등 정치권 인사들과 노동계·시민단체 관계자들이 근조기나 근조 화환을 보내왔지만, 장례준비위원회는 논의 끝에 받지 않기로 결정했다. 장례준비위원회 관계자는 “근조기나 근조화환이 쭉 늘어서 있는 모습을 고인이 바라진 않았을 것”이라며 “배달하시는 분들을 배려해 사진 촬영만 허가한 뒤 모두 돌려보내고 있다”고 설명했다.

백 소장의 딸 백원담 성공회대 중어중국학과 교수는 이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역사적 긴장을 살라시던 당신의 담금질과 깊은 사랑 잊지 않겠다. 늘 든든한 진보운동의 지향을 몸소 실천으로 열어주셔서 고맙다”며 아버지를 추모했다.

장례준비위원회는 오후 1시부터 조문객을 받는다. 백 소장의 유족, 통일문제연구소 관계자들이 빈소에서 조문객을 맞이할 예정이다. 장필수 기자

 

 

예술가이기도 했던 백 선생, 시집·영화극본 출간에 직접 무대
김지하·김민기부터 전인권·송경동까지 문화예술인 따르며 영감

 

2016년 2월 백기완 선생(왼쪽)과 송경동 시인이 영화 <동주>를 관람하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백기완 선생이 민중가요 ‘임을 위한 행진곡’의 작사가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 노래는 5·18 광주항쟁 이듬해인 1981년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과 ‘들불야학’ 동료였던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을 위해 만든 노래극 <넋풀이>에 삽입된 합창곡으로, 김종률이 작곡했고 소설가 황석영이 백 선생의 장시 ‘묏비나리-젊은 남녘의 춤꾼에게 띄우는’ 일부를 변형해서 가사로 썼다. 원작은 백 선생이 1982년에 비매품으로 냈던 첫 시집 <젊은 날>에 실려 있다.

백기완 선생은 <젊은 날> 말고도 <이제 때는 왔다> <백두산 천지> <아! 나에게도> <해방의 노래 통일의 노래> 등의 시집과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 <벼랑을 거머쥔 솔뿌리여> <부심이의 엄마 생각> 같은 산문집, <장산곶매 이야기> <따끔한 한모금> <버선발 이야기> 같은 옛이야기책 등을 펴냈고, 2009년에는 <한겨레> 연재를 거쳐 자전 산문집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를 출간하기도 했다. 어려서는 축구선수가 꿈이었고 젊은 시절에는 영화감독을 꿈꾸었다는 그는 <단돈 만원> <대륙> <쾌진아 칭칭 나네> 같은 영화극본 역시 책으로 내놓았다.

생전 백기완 선생 주변에는 통일·노동운동가들과 함께 문화예술인과 문화 분야 활동가들이 모여들었다. 1960~70년대 서울대 문화운동을 이끌었던 시인 김지하와 미술사학자 유홍준, 춤꾼 이애주, 소리꾼 임진택, 가수 김민기를 비롯해 화가 신학철, 가수 정태춘·전인권 등에서부터 최근에는 영화인 양기환과 시인 송경동 같은 예술인들이 그를 따랐다. 문학을 비롯해 문화의 거의 전 분야에 걸쳐 있는 이 예술가들은 백 선생을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영감과 자극을 얻었다. 그의 주변에 이처럼 문화예술인들이 모여든 까닭은 그가 설파하는 특유의 민족미학이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미학 일반에 관해서든 예술의 각 장르에 관해서든 나름의 미학을 지니고 있었고 그 핵심은 ‘조선 고유’의 양식으로 사회 변혁을 이끄는 예술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백 선생의 <장산곶매 이야기>가 황석영의 대하소설 <장길산> 서두를 장식하며 이 작품의 주제의식을 상징한다는 사실 역시 잘 알려져 있다. 지난 2014년 한국작가회의 창립 40주년 기념식 때 그가 ‘작가의 벗’으로 꼽혀 감사패를 받은 배경에는 문학과 문화 전반에 관한 그의 이런 관심과 애정이 있었다.

사석에서도 이야기와 노래, 호통과 눈물을 곁들이며 공연에 가까운 이야기 마당을 펼치고는 했던 백기완 선생은 시와 노래, 이야기 등으로 몇 차례 정식 무대 공연을 마련하기도 했다. 자신의 이야기 소설 <따끔한 한모금>을 소극장에서 온몸으로 구연하는 ‘말림’(2007년), 흘러간 유행가를 직접 부르며 그에 얽힌 자신의 삶을 회고하는 ‘노래에 얽힌 백기완의 인생이야기’ 공연(2009년), 그리고 2013년에 있었던 ‘백기완의 시 낭송의 밤’ 등이 대표적이다.

‘문화인 백기완’의 성취와 기여로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그의 지극한 우리말 사랑이다. 그는 평소 말과 글에서 한자어와 영어, 일본어 같은 외래 어휘를 삼가고 순우리말을 살려 쓴 것으로도 유명하다. 달동네, 새내기, 동아리, 모꼬지 같은 말들을 처음 만들어 쓴 것이 선생이었다. 그가 쓴 책들에는 이와 함께 땅별(지구), 한살매(인생), 배내기(학생), 덧이름(별명), 새뜸(뉴스), 들락(문), 눌데(방) 같은 어여쁜 순우리말들이 가득한데, 그중에는 그가 어려서부터 어른들한테서 들어 익힌 것도 있지만 그 스스로 애써 궁리해서 만든 것들이 적지 않다.

백기완 선생은 2016년 2월22일 사랑하는 후배 송경동 시인과 함께 영화 <동주>를 관람했다. 영화감독이 된다면 가장 먼저 윤동주와 송몽규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고 싶었다는 그에게 송경동 시인이 말했다. “영화 끝부분에서 윤동주가 창살 밖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는 장면이 특히 마음에 남았어요. 선생님과 함께 본 그 별들을 잊을 수 없을 것 같아요. 언젠가는 선생님을 그 별처럼 그리워할 때도 오겠구나 하는 생각에 영화를 보면서도 마음이 복잡해지고 눈물이 나오더라고요.” 그로부터 5년 뒤, 백기완 선생은 밤하늘의 별이 되었고 남은 이들은 별을 보며 생전의 선생을 그리워하고 있다. 최재봉 기자


정치권 “백기완 선생의 치열했던 삶, 영원히 기억될 것”

 

정치권은 15일 별세한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이 통일과 민주주의, 인권을 위해 헌신한 삶과 불의에 맞섰던 용기를 떠올리며 그의 영면을 기원했다.

이낙연 민주당 대표는 이날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민주화운동가 겸 통일운동가 백기완 선생께서 오늘 새벽 우리 곁을 떠났다. 그 치열했던 삶은 ‘임을 위한 행진곡’과 함께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선생님의 명복을 빈다”고 말했다. 김태년 원내대표도 백 소장을 “평생 통일 운동에 헌신한 분”이라고 기렸다.

 

1994년 당시 백기완 선생이 대학 집회 연설을 갔을 때의 모습.

박용진 민주당 의원도 자신의 페이스북에 “선생께서는 젊은 청년들의 가슴을 떨리게 하는 힘이 있으셨다. 독재와 불의에 맞서던 그분의 용기와 시대를 가르는 사자후로 청년들을 움직이게 하셨다. 그분의 연설을 들을 때면 용기가 솟았고, 나태함이 부끄러워졌다”고 적었다.

김은혜 국민의힘 대변인도 이날 구두논평에서 “고인은 모진 억압에도 굴하지 않고 한 평생 오로지 이 나라의 민주주의와 국민의 인권을 위해 헌신하셨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평등한 세상 또한 고인의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며 “진정한 진보란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 지금도 ‘어영차 지고 일어나는 대지의 싹’처럼 생명의 존엄, 정의와 공정의 가치를 일깨워주실 듯하다”며 고인의 명복을 기원했다. 송호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