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야사학자 임종국 유지로 설립, 친일 과거 청산 한 획

역사학계 "민간 노력 인정하지만 입체적으로 바라봐야"

 

백범 묘소에 놓인 '친일인명사전': 일제시절 식민지배에 협력한 인사들의 행적을 담은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발간 국민보고대회가 열린 2009년 11월 8일 서울 효창동 백범 김구 선생 묘소에 놓인 '친일인명사전'을 사람들이 살펴보고 있다.

 

서친일·반민족 행위를 조사하는 비영리 민간단체 민족문제연구소(민문연)가 27일 창립 30주년을 맞았다.

민문연은 재야사학자 임종국(1929∼1989)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1991년 설립됐다. 임종국 선생은 1965년 한일협정이 체결된 이후 '친일문학론'을 집필하는 등 친일문제 연구와 과거사 청산에 앞장선 인물이다.

초기엔 '반민족문제연구소'라는 이름으로 설립됐다가 1995년 현재의 민문연으로 이름을 바꾸고 상근자만 약 40명, 회원수 1만여명에 달하는 거대 단체로 성장했다.

민문연 30년 활동 중 가장 주목받는 것은 2009년 출판한 '친일인명사전'이다. 8년간 연구 조사를 거친 끝에 4천389명을 '친일파'로 규정해 수록했다. 교수와 학자 150여명, 집필위원 180여명, 문헌자료 연구자 80여명이 집필에 참여했다.

친일인명사전 착수는 199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민문연이 과거사 정리 차원에서 친일인사의 명단을 정리해 사전으로 만들어낼 계획을 밝히자 전국 116개 대학 교수 1만여명이 지지 선언을 냈다.

2001년 12월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가 출범하며 친일인사 선정 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으나 2003년 관련 예산이 국회에서 삭감되는 위기를 맞았다. 이듬해 국민들이 모금 운동에 나섰고, 11일 만에 성금 5억원이 모일 정도로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민문연은 과거사 특별법 제정 운동과 일제강제동원 피해자 소송 지원 등의 사업을 벌였으며 박근혜 정부가 추진한 한국사 국정교과서 반대운동을 펼쳤다.

2018년엔 민문연이 친일인명사전 이후 역점사업으로 둔 식민지역사박물관이 개관했다. 1875년 운요호 사건에서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 70년에 걸친 일제 침탈과 그에 부역한 친일파의 죄상을 담았다.

민문연은 이날 오후 2시 식민지역사박물관에서 임원진과 상근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창립 30주년 기념식을 개최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해 약식으로 진행되며 회원들에게는 유튜브로 생중계한다.

 

식민지역사박물관 개관: 국내 최초의 일제강점기 전문박물관인 식민지역사박물관이 2018년 8월 29일 서울 용산구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문을 열었다. 이 곳에는 전시와 교육을 통해 1875년 운요호 사건에서부터 해방에 이르기까지 70년에 걸친 일제 침탈과 그에 부역한 친일파의 죄상을 담겨있다. 사진은 이날 오후 서울 용산구 식민지역사박물관 전시관에서 관계자들이 내부를 둘러보는 모습. [연합뉴스]

 

역사학계 "과거사 청산 안돼 논란 지속…사회적 합의 이뤄야"

친일인명사전은 정식 출간 이전부터 논쟁이 끊이질 않았다. 민문연이 2005년 친일인사 3천여명의 명단을 1차 발표할 때도 찬성과 반대 여론이 팽팽히 맞섰다.

출간 이후 친일인사로 수록된 인물들의 유족과 후손들은 명예훼손 소송도 불사하겠다며 반발했고, 박정희 전 대통령을 포함해 정치적 인물이 '친일파'로 선정되자 보수 단체들은 "정치적 모략"이라고 주장했다. 민간이 규정하는 '친일' 개념의 학문적 엄밀함을 문제 삼는 지적도 있었다.

출판 이후 10여년의 세월이 흐른 현재 역사학계는 "민간의 노력은 인정해야 한다"면서도 "사전으로만 친일을 단순하게 이해해선 안 된다"고 강조한다.

김성보 연세대 사학과 교수는 "한국은 친일문제가 제대로 청산되지 않았다. 법적으로 재판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역사기록으로 남기는 것 자체는 의미가 있다"면서도 "행위와 인간에 대한 규정을 구분해야 된다"며 조심스러운 접근을 주문했다.

김 교수는 "사람은 공과가 있을 수 있고 민족운동하다가 친일행위자가 된 사람도 있고 다양한 사람들이 있기에 사전은 행위만 기록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며 "친일 행위에 대한 역사기록은 남겨야 하지만 그것으로 인간 전체를 평가하는 문제는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손기영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원 교수 또한 "시민사회나 대중에 알려진 사전이기에 좋은 영향도 있을 수 있지만 사전 등재 인물들을 하나하나 보면 친일이라는 하나의 잣대로 규정하기엔 협소하다고 보인다"며 "역사로 보는 넓은 시각을 왜곡시킬 수 있다"고 우려했다.

윤해동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교수는 "내용이 편의적이고 자의적"이라고 강하게 비판하면서도 "학계나 정부에서 제대로 된 근대인명사전을 낸 게 없기 때문에 친일인명사전이 일정 부분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반병률 한국외대 교수는 "(친일인명사전이) 계속 논란이 되는 이유는 해방 이후 친일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 주기적으로 나오는 상황이기 때문"이라며 "앞으로도 논란이 지속될 것이고 사회적으로 합의가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