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自足)하기를 배웠노니...(빌 4:11)
사도바울의 고백입니다.
비천에 처해도, 풍부에 처해도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스스로 만족(滿足)하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위대한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늘 조금 더 가져야, 늘 조금 더 누려야 만족할 것으로 착각하여 타 죽을 것을 알면서도 불속으로 달려드는 불나방처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사도바울은 참으로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이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법정스님처럼 무소유를 주장한 것도 아닙니다.
법정스님은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지만, 그 물건 때문에 또 마음이 묶이고 얽매이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많이 갖는다는 것은 그만큼 많이 얽혀 있게 되는 것이기에 사람을 힘들게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가난한 탁발승이오. 내가 가진 거라고는 물레와 교도소에서 쓰던 밥그릇과 염소젖 한 깡통, 허름한 담요 여섯 장, 수건 그리고 대단치도 않은 평판, 이것뿐이오.” 라고 말한 마하트마 간디의 어록을 읽으시다 자신이 가진 것이 너무 많다고 생각되어 몹시도 부끄러우셨다고 법정스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바울은 늘 부를 탐하는 속된 우리와도 또 무소유를 부러워하셨던 법정스님과도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여호와께서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 것으로 (삼상 2:7) 알았습니다. 
그리고 참된 만족은 가난에도, 부에도 있지 아니하며 낮아짐에도 높아짐에도 있지 아니함을 알고 있었습니다.
 
참된 만족이 부(富)에 있을 것으로 착각한 우리들이나 무(無)에 있을 것으로 착각하셨던 법정스님이나 성경적인 기준으로는 둘 다 틀린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자족(自足)함의 비결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섭리 가운데 우리를 때로는 가난에 처하게도, 때로는 부하게도 하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즉 지족(知足)함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내가 당하는 형편과 처지는 하나님의 목적하심과 관련이 있다는 자각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스스로 만족(滿足)하는 자족(自足, Self-Sufficiency)은 하나님으로만 만족하는 신족(神足, God-Sufficiency)과 그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것이 참된 만족되는 신족(信足, Faith-Sufficiency)으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지족(知足) 하는 것입니다. 

자족(自足)하는 만족(滿足)은 신족(神足)과 신족(信足)의 지족(知足)으로만 가능 하느니라!
괜히 유식한 척 한번 해 보았습니다만 성경은 훨씬 더 쉽게 위의 말을 풀어서 하나님께 올리는 기도로 표현했습니다.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잠언 30: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