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배상 판결 확정했는데도 뒤집는 하급심 판결 잇따라

 

김명수 대법원장 등 대법관들이 2018년 10월 일제 강제노역 피해자들이 일본 신일본제철(현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 전원합의체 판결을 선고하기 위해 자리에 앉고 있다.

 

일제 강점기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일본 전범 기업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냈지만 또다시 패소했다. 2018년 10월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배상 판결을 확정했는데도, 이를 뒤집는 하급심 판결이 잇따라 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번 판결은 법리적으로 기존 대법원 전합 판결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라고 보긴 힘들지만, 결과적으로 또다시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서울중앙지법 민사25단독 박성인 부장판사는 11일 강제노역 피해자 ㄱ씨 등 5명이 미쓰비시 마테리아루(옛 미쓰비시광업)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원고패소 판결했다고 11일 밝혔다. 피해자들은 일제 강점기, 일본에 강제연행된 뒤 강제노역을 당해 정신적·육체적 고통을 입었다며 미쓰비시를 상대로 2017년 2월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이날 재판에서는 ‘손해배상 청구권 소멸시효’ 기산점을 언제부터 봐야 하는지가 쟁점이 됐다. 민법상 손해배상청구권은 불법행위의 손해나 가해자를 안 날로부터 3년 안에 행사하지 않으면 시효가 소멸된다. 이에 ㄱ씨 등 피해자들은 2018년 대법원 전합 확정판결을 기준으로 소멸시효를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일본 기업 쪽은 2012년 대법원 파기환송 판결을 기준 시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맞섰다. 즉, ㄱ씨 등은 2017년에 소송을 냈기 때문에 2012년 대법원 판결을 기준으로 삼을 경우 소멸시효가 완성되고, 2018년을 기준으로 할 경우 손해배상청구권이 인정되는 것이다.

 

2012년 대법원 1부(주심 김능환 당시 대법관)는 일본제철 강제노역 피해자 이춘식씨 등 4명이 일본제철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권은 한일청구권 협정으로 소멸하지 않았다”며 원고패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원고승소 취지로 사건을 파기환송했다. 한국 법원이 처음으로 강제노역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권을 인정한 것이다.

 

이어 파기환송심을 맡은 서울고법은 2013년 7월 대법원 판결 취지대로 “일본 기업은 피해자들에게 1억원씩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이후 대법원은 5년 넘게 재상고심 심리와 선고를 미뤘고, 그 사이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가 이 사건과 관련해 재판을 늦추거나 대법원 판결을 뒤집는 방안을 박근혜 정부와 논의하는 등 ‘재판거래’를 했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이에 대법원은 뒤늦게 2018년 7월에서야 이 사건을 전원합의체에 회부했고, 그해 10월 피해자들의 손을 들어줬다. 당시 사건 쟁점이었던 ‘한일청구권 협정으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권이 소멸했는지’를 두고 전합은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권은 소멸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재판관 7대6의 의견이었다.

 

재판부는 이날 일본 기업 쪽 주장을 받아들였다. 한일청구권 협정으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권이 소멸되지는 않았지만, 이를 인정한 2012년 대법원 첫 판결이 나오고 5년이 지나서야 ㄱ씨 등이 소송을 냈다는 이유에서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권을 인정하지 않는 판결이 또다시 나온 것이다.

 

재판부는 “대법원이 2012년 판결을 통해 강제노역 피해자의 손해배상청구권이 소멸하지 않았다고 판단했고, 이는 파기환송심과 재상고심을 거쳐 2018년 10월 확정됐다”며 “ㄱ씨 등의 손해배상청구권은 2018년 대법원 전합 판결이 아닌, 2012년 대법원 판결로 행사할 수 있게 됐다. 그런데 ㄱ씨 등은 민법상 소멸시효 기간인 3년을 넘긴 2017년에 소송을 냈기 때문에 소멸시효가 완성됐다”고 밝혔다.

 

앞서 같은 법원 민사합의34부(부장판사 김양호)는 지난 6월7일 강제노역 피해자 송아무개씨 등 85명이 일본제철 주식회사 등 일본 기업 16곳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각하 판결을 내린 바 있다. 당시 재판부는 “대한민국 국민이 일본이나 일본 국민을 상대로 한 개인청구권은 한·일청구권 협정에 의해 소멸하거나 포기됐다고 할 수는 없지만, 소송으로 이를 행사하는 것은 제한된다”며 대법원 전합 판결을 정면으로 뒤집어 논란이 일기도 했다. 손현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