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정부 인사 석방 요구한 서방 10개국 대사에 ‘외교적 기피 인물’

터키에서 추방 가능한 조처…서방 국가들 긴밀 대처 협의중

대사 추방 현실화되면 터키-서방 외교 정면 충돌 불가피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23일 터키 북서부 에스키세히르에서 지지자들에게 반정부 인사 석방을 요구한 서방 10개국 대사의 추방이 가능한 조처를 명령했다고 밝히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반정부 인사 석방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한 미국 등 서방 10개국의 대사들에게 추방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23일 터키 북서부 에스키셰히르에서 “이 10명의 대사들에게 ‘페르소나 논 그라타’가 즉각 선언되도록 외교장관에게 지시했다”며 “그들은 터키를 알고, 이해하게 될 것이다. 터키를 알고 이해하지 못하면, 떠나야 할 것이다”고 말했다. ’페르소나 논 그라타’는 외교적 기피 인물을 뜻하는 용어이다. 페르소나 논 그라타로 지정되면, 외교적 지위가 박탈돼 추방될 수 있다.

 

캐나다·덴마크·핀란드·프랑스·독일·네덜란드·뉴질랜드·노르웨이·스웨덴·미국의 터키 주재 대사 10명은 지난 10월18일 공동성명을 내고 카발라 사건에 대한 공정하고 신속한 해결 및 “즉각적 석방”을 촉구했다. 대사들은 성명에서 오스만 카발라의 재판 지연을 비판하면서 이는 민주주의에 대한 존중, 법치, 터키 사법 체계의 투명성에 그림자를 드리운다고 지적했다. 이 가운데 7개국은 터키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동맹국들이다. 터키 외무부는 성명이 나온 직후 이들 대사를 초치해 항의했다.

 

서방 10개국 대사들이 석방을 요구한 오스만 카발라가 이스탄불의 한 집회에서 연설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기업인이자 인권운동가인 카발라는 환경운동가들과 함께 지난 2013년 정부가 이스탄불 도심의 게지 공원을 재개발하려 하자 반대 시위를 주도했다. 경찰의 강경 진압으로 이 시위는 전국적인 반정부 시위로 확산됐다. 검찰은 카발라를 2017년에 체포해 종신형을 선고했으나, 법원은 지난해인 2020년 2월 그를 포함한 9명을 무죄 석방했다. 하지만, 터키 당국은 석방 몇시간만에 지난 2016년에 실패한 군사쿠데타 연루 혐의가 있다며 다시 체포했다. 법원은 올해 2013년 반정부 시위 주도 혐의와 쿠데타 연루 혐의에 다시 유죄를 선고했다.

 

카발라 사건은 터키의 인권 문제를 놓고 터키와 서방 국가들의 알력을 드러내는 상징적 사건으로 커지고 있다. 유럽연합의 인권기구인 유럽위원회는 터키에게 카발라를 석방하라는 유럽인권재판소 판결을 준수하라고 경고해왔다. 카발라는 지난 22일 에르도안의 최근 발언을 감안하면 자신에 대한 공정한 재판을 불가능해서 재판 출석은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에르도안의 조처에 따라 이들 서방 국가 대사들이 실제로 터키에서 추방된다면, 정면 충돌이 불가피해 보인다. 나토의 회원국으로 오랫동안 서방의 동맹국으로 역할해온 터키는 에르도안 집권 이후 서방의 영향력을 줄이고 독자 행보를 강화해왔다. 에르도안은 특히 최근 들어서 러시아제 방공 시스템 도입 등으로 러시아와의 군사적 협력까지 확대해, 미국의 큰 우려와 반발을 사고 있다.

 

독일 외교부는 해당 국가들이 ‘긴밀한 협의’를 하고 있다고만 밝혔다. 노르웨이 외무부는 앙카라 주재 대사관이 이 문제와 관련해 터키 당국으로부터 통보를 받지 못했다며 “우리 대사는 추방당할만한 일을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노르웨이 외무부는 “우리는 터키에게 유럽인권조약에 따라 지켜야 할 민주적인 기준 및 법치를 준수하라고 계속 요구할 것이다”고 터키의 조처를 수용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정의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