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심리서 양쪽의 입장 팽팽히 맞서

 

 

캐나다에서 여성과의 합의를 깨고 피임도구를 착용하지 않은 채 성관계를 맺은 한 남성이 성폭행 혐의로 대법원에 서게 됐다.

 

캐나다 대법원은 4일 상대의 요청에도 성관계 중 콘돔을 착용하지 않은 남성을 성폭행으로 처벌할지를 두고 심리를 진행했다. 지난 2017년 3월 온라인을 통해 만난 두 남녀는 성관계를 갖기 전 콘돔을 사용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두번째 성관계 때 남성이 여성과의 약속을 깨고 콘돔을 착용하지 않았다.

 

가해 남성은 성폭행 혐의로 기소됐다. 여성이 콘돔 없이는 성관계를 갖지 않겠다는 원칙을 밝혔는데도 남성이 이를 어겼기 때문에 ‘동의 없는 성관계’나 다름없다는 이유에서다. 남성은 경찰 진술과 2018년 첫 재판에서 피해 여성이 성관계 전 그런 조건을 말한 적 없다고 부인했다. 당시 재판부는 여성의 주장에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남성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여성의 항소로 열린 지난해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주 항소심은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새로 심리하라고 명령했다.

 

대법원에서도 양쪽의 입장은 팽팽히 맞섰다. 피해 여성의 법률 지원에 나선 여성법률교육행동재단(Women’s Legal Education and Action Fund)의 변호사 로젤 킴(Rosel Kim)은 “이 사건은 동의에 관한 것”이라며 “특히 성관계 중 콘돔 사용이 개인의 자율성, 평등, 존엄성을 지키는 데 얼마나 근본적인 문제인지 생각해야 한다”고 했다. 반면 가해 남성 쪽 변호사는 “성관계 동의에 대한 기준이 대법원 판결로 세워져서는 안 되며 의회 입법을 통해 논의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캐나다 언론과 외신은 이번 재판이 성관계 동의의 법률적 구성 요건에 대한 논쟁이 확대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날 재판에서는 남성이 콘돔을 몰래 훼손한 2014년 사건이 거론되기도 했다. 캐나다에서 한 여성이 콘돔 사용을 조건으로 성관계를 동의했는데, 남성이 콘돔에 몰래 구멍을 뚫어 여성을 임신시킨 사건이다. 이후 남성은 성폭행으로 기소됐고, 대법원에서 최종 유죄가 확정됐다. 성관계 중 상대방의 동의 없이 피임도구를 제거·훼손하는 ‘스텔싱’(stealthing)을 새로운 유형의 성폭력으로 인정한 것이다.

 

미국 일부 지역에서는 스텔싱을 금지하는 법안이 통과되기도 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는 지난달 미국 50개주 가운데 처음으로 스텔싱이 성폭행에 해당한다는 내용을 민법에 추가했다. 캘리포니아주는 형법으로 이미 피해자의 적극적 동의가 없는 성관계를 강간으로 규정하고 있었지만, 이번 법 개정으로 ‘스텔싱=성폭행’이란 점을 더 명확히 했다. 법안이 시행되면 스텔싱 피해자는 가해자를 상대로 징벌적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국내에서도 최근 ‘스텔싱 처벌법’이 처음 발의됐다. 소병철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9월 피임도구를 사용하는 것처럼 상대방을 속이거나 이를 동의 없이 제거·훼손하는 행위를 처벌하는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성폭력처벌법) 일부 개정안을 발의했다. 개정안은 피임도구에 대한 사용동의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구성한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류호정 정의당 의원도 지난해 8월 강간의 구성요건을 폭행·협박 등에서 피해자의 동의 여부로 강화한 형법 개정안을 발의한 바 있다. 박고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