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사관 영사보 호리구치 126년 전 서신 8통

일본계 미국인이 나고야 골동품 시장서 입수

“우리가 왕비 죽였다…진입은 내 담당 임무”

 

일본 <아사히신문> 홈페이지 갈무리.

 

일본 외교관이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자신이 가담했다고 지인에게 털어놓은 126년 전 편지가 발견됐다. 명성황후의 죽음에 일본의 현직 외교관이 직접 가담했음을 보여주는 ‘희귀한 자료’다.

 

조선 공사관 영사보였던 호리구치 구마이치(1865~1945)는 명성황후 시해 다음 날인 1895년 10월9일에 니가타현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우리가 왕비를 죽였다”며 명성황후 시해 사건 경위를 상세히 적었다고 일본 <아사히신문>이 16일 보도했다. 호리구치는 이 편지에서 “진입은 내가 담당하는 임무였다. 담을 넘어 (중략) 간신히 건물 안쪽에 들어가 왕비를 시해했다”고 적었다. 그는 “생각보다 간단해 오히려 매우 놀랐다”고 감상까지 적었다. 그는 일본 외교관, 경찰, 민간인 등으로 구성된 명성황후 시해 실행 그룹 중 한 명이었다.

 

이번에 발견된 호리구치의 편지는 1894년 11월17일부터 을미사변 직후인 1895년 10월18일자까지 8통으로, 일본 나고야시에 사는 일본계 미국인 스티브 하세가와가 골동품 시장에서 입수한 것이다. 붓으로 흘려 쓴 편지 내용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다룬 책 <조선 왕비 살해와 일본인>을 쓴 재일동포 학자 김문자씨가 해독했다. 김씨는 “사건의 세부와 가족에 대한 기술 등으로 보더라도 본인의 친필이 틀림없다”며 “현역 외교관이 임지에서 왕비 살해에 직접 관여했다고 밝히는 글에 새삼 생생한 충격을 느꼈다”고 말했다고 신문은 전했다.

 

경복궁의 모습 중 일부. 1895년 10월 8일 경복궁에서 명성황후가 일본군과 외교관, 경찰 등으로 구성된 일본인들에게 시해당했다.

 

을미사변은 1895년 10월8일 일본 육군 출신 미우라 고로(1847~1926) 조선공사의 지휘로 조선 내에서 활동하던 일본의 ‘대륙 낭인’(민간인 신분으로 일본의 동아시아 침략을 위해 활동했던 인물들)들과 일본군과 경찰 등 일부 병력이 우범선(1857~1903) 훈련대 제2대대장 등 일부 조선인들과 경복궁을 기습해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이다. 이들은 명성황후를 시해한 뒤 주검에 석유를 끼얹어 불태우기까지 했다. 스에마쓰 겐초(1855~1920) 법제국 장관은 당시 보고서에서 “참으로 붓으로 옮기기에 참을 수 없지만…”이라고 단서를 붙이며 당시 이뤄진 행위를 구체적으로 적었다.

 

명성황후 시해는 과거엔 대륙 낭인들이 전면에 나서 저지른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 호리구치 같은 현직 외교관을 포함한 공적 지위를 가진 일본인들이 실행에서도 주요한 역할을 했음이 드러나고 있다.

 

다만, 명성황후를 실제로 찌른 인물은 정확히 특정되지 않고 있다. 우치다 사다쓰치 당시 조선공사관 일등영사는 사건 당일 하라 다카시 당시 외무차관에게 편지로 보낸 보고에서 명성황후를 찌른 인물이 “모 육군 소위”라고 했으나, 이 밖에도 여러 인물들 이름이 거론된다.

 

조선은 불평등 조약이었던 1876년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의 치외법권 조항에 가로막혀, 명성황후 시해 가담 일본인들에 대한 재판권도 행사하지 못했다. 이들은 사건 뒤 일본으로 송환됐으나 처벌을 받지 않았다. 사건 이듬해 1월 일본 육군 장교 8명이 히로시마 군법회의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고, 호리구치 등 48명도 히로시마지방재판소에서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면소 처리되어 석방됐다. 조선은 일본에 강제병합될 때까지 불평등 조약을 개정하지 못했다. 조기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