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여파, 세계 식량공급망 불안

 

세계 식용유 주공급원인 러 · 우크라

밀 · 보리 최대 수출국의 하나이기도

 개전 뒤, 인니 자국 팜유 보호 나서

“중동 등 1천만명 식량 불안” 우려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북아프리카 국가들의 식량 불안은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됐다. 한 예멘 여성이 1월5일 예멘 수도 사나 외곽 실향민 캠프 인근에서 빵을 들고 있다. EPA연합뉴스

 

팜유. 이름 그대로 팜(기름야자) 열매에서 뽑아낸 기름이다. 빵을 만들 때 버터 대신 쓰기도 하고, 식용유로 쓰기도 한다. 비스킷, 초콜릿, 비누와 세제 등에도 팜유가 들어간다. 생산과 수출을 가장 많이 하는 나라는 인도네시아다. 세계 수출량의 60% 정도를 인도네시아가 차지한다. 팜유는 석유보다 탄소배출량이 적어 바이오디젤 원료로도 쓰이는데, 정작 보르네오섬은 팜 농장들이 늘면서 숲이 사라져간다. 환경단체들이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러 전쟁 뒤, 세계 먹거리 ‘비상’

 

지난 17일 인도네시아 정부는 팜유 수출세를 대폭 올렸다. 선적할 때마다 수출세를 내는데, 거기에 별도로 수출부담금을 매기고 누진율까지 적용하기로 했다. 자국 수출업자들에게 타격을 줄 게 뻔한 이런 조처를 한 이유는 식용유값이 폭등했기 때문이다. 인도네시아산 팜유의 3분의 2가 외국으로 팔려 가는데, 세금을 올려 일단 수출을 억제해보겠다는 것이다. 생산량 가운데 국내시장에서 의무적으로 팔아야 하는 양도 20%에서 30%로 늘렸다.

 

팜유 생산업자들은 반발했고, 일부 의원들은 정부가 규정을 자주 바꿔 시장에 패닉이 일어나고 있다고 비난했다. 반면 정부는 국제 원자재가 상승과 투기성 거래에 화살을 돌렸다. 일리는 있다. 팜유 가격은 올해 들어 50% 넘게 올랐으며 거기에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영향을 미쳤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식용유의 주된 공급국인데 그쪽의 유채씨기름(카놀라유)과 해바라기유 수출이 줄어드니 인도네시아에서까지 식용유 파동이 일어난 것이다.

 

식용유값이 걱정인 인도네시아는 낫다. 오랜 내전에 시달린 시리아 사람들은 숨겨진 최악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세계식량계획(WFP)에 따르면 여전히 시리아에서 1340만명이 식량 불안을 겪고 있다. 지난해 말 유엔은 시리아에 가뭄까지 겹치면서 밀 생산량이 줄어 160만톤이 모자랄 것으로 봤다.

 

시리아인들은 10년 넘게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의 독재정권에 맞선 싸움을 벌였으나 아사드는 러시아의 도움을 받아 권력을 연장했다. 그런데 이제는 러시아가 일으킨 동유럽의 전쟁 때문에 시리아인들의 고통이 추가될 판이다. 시리아는 러시아의 차관을 받아 밀 100만톤을 수입하기로 했는데,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이 협상이 중단됐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세계 식량 가격은 2월에 사상 최고치로 올라 전년 동기 대비 20.7%의 상승을 기록했다. 전쟁에 따른 식량공급망 교란은 여기저기서 시작됐다. 우크라이나는 지난해 러시아, 미국, 캐나다, 프랑스에 이어 세계 5위 밀 수출국이었다. 곡물 전체로 보면 러시아가 3위, 우크라이나가 4위 수출국이다. 두 나라가 공급하는 밀과 보리가 세계 교역량의 3분의 1에 이른다. 그런데 러시아가 전쟁을 시작하자 우크라이나는 필수 곡물의 수출을 제한하기 시작했다. 이미 계약돼 외국으로 보내야 하는 곡물조차 밖으로 못 나가고 있다. 곡물 수출의 거의 80%가 남서부의 오데사, 미콜라이우, 초르노모르스크를 통해 흑해로 나갔는데 이 항구들이 러시아군에 막힌 것이다.

 

2019년 인도네시아 아체주 한 마을의 기름야자(팜) 농장을 드론으로 촬영한 모습. EPA 연합뉴스

 

<로이터> 통신 등에 따르면 지난해 우크라이나의 곡물 작황은 기록적으로 좋았다. 그런데 지난해 가을에 심은 겨울밀에는 쓸 비료가 모자라고, 설비를 돌릴 연료도 부족하다. 옥수수와 보리는 다음달에 심어야 하는데, 폭격이 걱정돼 농사를 짓기도 힘들다. 식량 시장의 교란이 장기화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우크라이나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세르비아, 헝가리,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 주변 동유럽국들도 불안해져서 잇달아 곡물 수출을 막거나 줄였다. 침공을 감행한 러시아는 생산에 차질을 빚을 일이 없지만 시장이 러시아산 곡물을 거부하고 있다. 곡물 데이터를 분석하는 애그플로는 3월 첫 2주 동안 러시아 항구를 떠난 곡물 수출 선박이 73척에 그친 것으로 봤다. 전년 같은 기간에는 220척이었다.

 

미국 시카고 상품거래소의 밀 선물가격은 올해 들어 60% 안팎으로 올랐다. 중국마저 기상 조건이 나빠 밀 생산량이 평년보다 20% 줄어들 것이라는 얘기가 나온다. 가격 급등을 막기 위해 중국 정부는 66억달러(약 8조450억원) 규모의 농업보조금을 추가로 배정했다. 중국은 세계 밀 생산량의 절반을 차지하는데 대부분 자국 내에서 소비된다. 설상가상 미국의 평원도 가뭄을 맞고 있다.

 

중동과 북아프리카 국가들에 식량 불안은 발등의 불이다. 주로 식량을 수입하는 이 지역에는 빵 같은 기본 식료품에 정부가 보조금을 대주는 나라가 많다. 그런데 원재료값이 너무 오르면 정부가 보조금으로 낮은 가격을 지탱해주기가 힘들어진다.

 

레바논, 밀 9할이 러·우크라산인데…

 

세계 최대 밀 수입국인 이집트에서는 인구 대부분인 7천만명이 정부의 식료품 보조금 혜택을 받고 있다. 지난달 23일 무스타파 마드불리 총리는 현재 밀 비축량이 4개월치이고, 다음달 중순 국내산 밀이 수확되면 비축량이 9개월치로 늘어난다며 국민들을 안심시켰다. 하지만 재정난이 심각해지면서 정부는 식료품 보조금을 줄이고 있다. 이집트에서는 1977년 정부가 식료품 보조금을 끊자 ‘빵 폭동’이 일어났다. 2011년에는 튀니지에서부터 시작된 ‘아랍의 봄’ 혁명이 중동과 북아프리카를 뒤흔들었는데, 당시 상황도 식료품값 폭등과 이어져 있었다. 미국 외교·안보 싱크탱크 ‘애틀랜틱카운슬’의 경제 전문가 닐스 그레이엄은 최근의 식료품값 폭등이 아랍의 봄 때보다 더 심하다면서 “밀 공급의 80%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 의존해온 이집트의 경우 정부 지출이 전쟁 때문에 두 배로 늘어날 것”이라 예상했다.

 

레바논은 더 심각하다. 레바논 세관 통계에 따르면 2020년 기준으로 전체 밀 수입량의 80%는 우크라이나에서, 15%는 러시아에서 왔다. 그해 8월 베이루트 항구에서 대규모 폭발 사고가 일어나 넉달치 밀 비축량이 날아갔다. 코로나19가 번지고 관광산업이 무너지면서 레바논 인구의 80%가 빈곤에 시달리게 됐다. 정부는 지금도 매달 2천만달러를 밀 구입 보조금으로 쏟아붓고 있는데,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한계에 부딪혔다. 레바논 경제장관은 지난 5일 트위터에 밀 배급제를 시작할 것이라는 글을 올렸다. 휴먼라이츠워치는 “우크라이나에서의 충돌로 중동과 북아프리카에 사는 1천만명이 식량 수급 불안을 겪을 것”이라며 “식량공급망이 글로벌화했기 때문에 위기 상황에서는 글로벌 연대가 필요하다”고 국제 공동 대응을 촉구했다.    구정은 국제 전문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