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일 0시 서울서부지방법원에 윤석열에 대한 체포영장 청구"

 

 
경기도 과천시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의 모습. 연합
 

12·3 내란사태를 수사 중인 공조수사본부(공조본)가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체포영장을 청구했다고 30일 밝혔다.

내란 사태 수사를 위해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경찰청 국가수사본부 특별수사단 등이 구성한 공조본은 이날 “30일 0시 서울서부지방법원에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체포영장을 청구했다”라고 밝혔다. 앞서 윤 대통령은 29일까지 출석하라는 공조본의 3차 출석요구에 불응했다.   < 정혜민 기자 >

 

‘윤석열 체포영장’ 실제 집행 가능할까…경찰 “발부되면 집행해야”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의 모습. 연합
 

12·3 내란사태의 핵심 피의자인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체포영장이 청구된 가운데, 영장이 발부되더라도 실제 집행이 가능할지에 관심이 쏠린다. 경찰은 “체포영장에는 제한 사유가 없다”며 영장 집행 의지를 밝혔다.

경찰청 국가수사본부 비상계엄 특별수사단(특수단)은 30일 기자 브리핑에서 대통령경호처가 체포영장 집행을 거부할 우려에 대해 묻는 취재진 질문에 “체포영장에는 제한 사유가 없는 거로 안다”며 “영장이 발부되기 전에 (윤 대통령이) 출석한다면 조사가 이뤄질 수 있겠지만, (그전에) 체포영장이 발부된다면 집행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경찰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국방부 조사본부가 모인 수사협의체 공조수사본부(공조본)는 이날 윤 대통령에 대한 체포영장을 청구했다.

앞서 대통령경호처가 세 차례의 압수수색 시도에 모두 불응하면서, 체포영장 역시 발부되더라도 집행이 어려워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대통령이 관저 등에 머무를 경우 수색 영장이 추가로 필요할 수 있고, 대통령경호처는 체포를 위한 수색 역시 형사소송법 110·111조에 근거해 거부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수단은 이에 대해 “아직 발부되지 않은 영장에 대해 언급하기 조심스럽다”면서도 “충분히 대비하고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공조본은 대통령실 압수수색도 재차 시도할 것으로 보인다. 공조본은 이날 대통령실에 구체적인 압수수색 불승인 사유의 소명과 관련 자료 임의제출을 요청하는 공문도 발송했다.     < 한겨레 이지혜 기자 > 

윤석열이 긁은 ’계엄의 비용’…“5100만명이 장기 할부로 갚아야”

반헌법적 12∙3 비상계엄의 비용은?
불편으로 치부된 시민의 고통과 비용
계엄 뒤 환율 급등과 증시 하락 겹쳐

 
 
지난 4일 새벽 서울 여의도 국회 의사당에 무장한 계엄군이 진입을 시도하고 있다. AFP 연합
 

“세계사를 살펴보면 자유시장과 자유주의 정치 시스템이 있는 곳에서 번영과 풍요가 꽃을 피웠습니다. 저는 무너진 헌법 가치를 바로 세우고….” 다음 대통령이 누가 될지 알 수 없으나, 그의 취임사에 ‘무너진 헌법 가치’의 회복과 수호는 새겨질 게 틀림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말을 뱉은 윤석열 대통령은 결국 자신의 발언을 스스로 전복시켰다. 지난 3월 총선을 앞두고 제51회 상공의 날을 맞아 그는 ‘자유주의 경제시스템에서 기업 활동의 자유와 국가의 역할’이란 제목의 경제사상을 다룬 논문 같은 으레 긴 강연을 하면서 말을 이어갔다.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를 복원하여 더욱 강화하는 것이 대통령의 가장 큰 책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자신의 말마따나 ‘대통령의 가장 큰 책무’를 해태하고, 결과적으로 권력을 잠시 맡겨준 국민을 배신했다.

‘선택할 자유’를 버린 대통령

군대와 경찰을 동원해 시민의 자유를 폐기한 윤 대통령은 놀랍게도 지난 3년간 자유의 수호자를 자처해왔다. 그가 취임사에서 35번, 광복절 경축사에서 33번,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22번이나 외쳤던 ‘자유’는 기실 우리가 익히 교과서에서 배운 자유와는 다른 것인지 모른다. 그의 가치관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는 밀턴 프리드먼이 쓴 책, ‘선택할 자유’도 제대로 읽지 않았거나 엉뚱하게 독해했을 가능성이 짙다.

21세기 보수주의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경제사상가 중 한명인 프리드먼은 책에 이렇게 썼다. “군대나 경찰은 모두가 국내외의 억압∙폭력으로부터의 보호를 위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전혀 다른 목적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자유사회를 성취하고 유지하는 데 가장 어려운 문제는 자유의 보루로서 정부에 맡겨놓은 군대나 경찰에게 어떻게 하면 본래의 목적에만 충실하게 하고 엉뚱하게 자유를 짓밟는 일을 막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다. 우리의 개국공신들은 헌법을 기초할 때 이 문제를 놓고 씨름을 했었다. 현재의 우리는 이 점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작은 정부’를 지향한 프리드먼이 ‘큰 정부’를 겨냥해 쓴 책이지만, 불법 비상계엄은 그가 말하는 군대나 경찰의 본래의 목적과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다. 그는 또 다른 책, ‘자본주의와 자유’에서도 “경제적 자유의 증가가 정치적∙시민적 자유의 증가와 함께 이루어졌고, 더 큰 번영으로 이어졌으며, 경쟁적 자본주의와 자유는 분리할 수 없는 것임이 드러났다”고 썼다.

그의 열혈 독자였던 대통령 윤석열은 보수 경제사상과 정책을 관통하는 작은 정부론과 규제 완화, 감세 등을 서툴게나마 이해하고 추진했지만, 정작 프리드먼이 그 대전제로 여긴 ‘자유의 보루로서 정부’는 거부했다. 그는 한국 현대 정치사를 44년 전으로 퇴행시킨 ’반헌법적’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사상적 스승의 교훈을 따르지 않았다. 어쩌면 그는 스승의 사상이 아니라, 1973년 쿠데타로 집권한 뒤 자유시장주의 노선을 채택한 칠레 독재자 피노체트의 경제정책을 자문해줬다는 의혹을 받는 프리드먼의 행동에서 ’엉뚱한’ 영감을 얻었는지 모른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3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긴급 브리핑을 하고 있다. 윤 대통령은 “비상계엄을 통해 망국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자유 대한민국을 재건하고 지켜낼 것”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실 제공

 

‘GDP 살인자’가 된 친위 쿠데타 

대통령 윤석열의 비상계엄이 국회에서 빠르게 해제되긴 했지만,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 가장 비싼 2시간 반짜리 계엄의 경제적 비용은 모든 국민이 그것도 상당히 오랫동안 치러야 할 것으로 보인다. 미 보수경제지 ‘포브스’는 지난 6일 ‘윤석열의 필사적인 곡예가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살인자(Killer)인 이유’란 제목의 분석 기사에서, 한국 경제에 엄청난 손실을 초래한 비상계엄을 한 마디로 ‘지디피 살인자’로 표현했다. 기사는 말미에 섬뜩한 문장으로 끝난다. “윤 대통령의 이기적인 계엄령 사태가 초래한 값비싼 대가는 한국인 5100만 명이 시간을 두고서 분할해 지불하게 될 것이다.”

역사에 오래 기록될 사고를 친 대통령의 현실 인식은 이런 진단과도 너무 동떨어져 있다. 계엄을 한국 사회가 잠시 겪은 ‘불편’ 정도로 여긴다. 계엄이 뜻대로 되지 않고 실패한 지 나흘 만에 내놓은 첫 번째 대국민 담화에서 대통령 윤석열은 “이번 비상계엄 선포는… 하지만 그 과정에서 국민께 불안과 불편을 끼쳐 드렸다”라고 말한다. 또 그 뒤 닷새째 되는 12일에는 에이포(A4)용지 15쪽에 이르는 장문의 ‘국민께 드리는 말씀’에서 “짧은 시간이지만 이번 계엄으로 놀라고 불안하셨을 국민 여러분께 다시 한 번 사과”한다고 밝혔다. 지난 3일 그의 손을 거쳐 나온 ‘계엄사령부 포고령’(제1호) 6항에서도 ‘불편’이란 단어가 등장한다. “반국가세력 등 체제전복세력을 제외한 선량한 일반 국민은 일상생활에 불편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조치한다.” 또 그날 밤 비상계엄을 선포하면서 낸 긴급 담화문에서도 “계엄 선포로 인해… 선량한 국민께 다소의 불편이 있겠습니다마는, 이러한 불편을 최소화하는 데 주력할 것”이라고 했다.

대통령 윤석열에게 보수가 그토록 즐겨 써왔던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훼손, 그리고 국민의 기본권 침해와 엄청난 경제적 충격과 피해를 불러온 비상계엄은 ‘불편’이란 단어로 표현된다. ‘어떤 것을 사용하거나 이용하는 것이 거북하거나 괴로움’을 뜻하는 불편의 사전적 뜻을 아무리 곱씹어도 계엄이 초래한 상황을 설명하기엔 너무 가볍다. 한국 사회가 장기간 할부로 갚아나가야 할 엄청난 계엄의 비용이 잠시, 잠깐의 불편일 순 없다. 그의 의도와 계획이 그나마 실패해서 다행이지, 성공했다면 한국 사회는 회복하기 어려운 재앙에 가까운 고통과 비용을 요구받았을지 모른다.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4일 오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정부 합동 브리핑을 마치고 퇴장하고 있다. 김영원 기자 
 

민주주의도, 경제도 위태롭게 한 계엄

지난 12일 국회의원 190명이 국회에 제출한 대통령 윤석열에 대한 탄핵소추안은 대한민국 시민들이 떠안게 된 계엄의 비용을 총론적으로 이렇게 정리했다. “피소추자의 위헌, 위법한 비상계엄선포와 무장병력을 사용한 내란 행위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과 대한민국의 국제적 위상이 흔들리고, 급격한 환율 인상, 경제와 정국의 불안이 초래되었다… 국민을 지켜야 할 국군이 총부리를 국민에게 향하는 모습을 본 국민은 불안과 공포에 떨었으며, 환율과 주가는 요동을 쳤고 경제에 대한 우울한 전망이 우세해졌다.” 소추안은 ‘신속한 탄핵소추와 파면’만이 “손상된 근본적 헌법질서의 회복이며, 국민의 통합, 정국의 안정, 경제 불안 해소에 기여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 경제 불안’이 가장 크게, 직접 나타난 곳은 금융시장이다. 특히 탄핵 소추안에서 언급한대로 원-달러 환율(이하 환율)이 급등했다. 환율 상승은 미국 달러에 견줘 원화의 가치 하락을 의미한다. 유로화와 엔화 등 주요 6개 통화 대비 달러화의 상대 가치의 변화를 보여주는 달러인덱스는 계엄 전날인 지난 2일(한국 시각)부터 27일 현재까지 대략 1.5% 상승했지만, 원화 대비 달러화의 가치는 같은 기간 4.8%나 뛰었다. 달리 말해 주요 6개 통화 대비 원화의 가치가 3배나 더 하락한 셈이다. 원화 가치의 하락은 원부자재 수입 시 가격 상승 부담과 해외 자금 조달 및 상환 비용의 증가를 의미한다. 물론 미국의 중앙은행이라 할 수 있는 연방준비제도(Fed, 연준)의 금리 인하 속도 조절과 ’강달러주의자’ 트럼프의 당선이란 변수도 영향을 줬지만 무엇보다 비상계엄에 이은 탄핵 소추와 이후 안갯속을 헤매는 정국의 혼란이 결정적 요인이라 할 수 있다. 계엄 전날부터 27일까지 환율은 딱 4일 하락했고, 반대로 상승(원화 가치 하락)한 날이 18일이나 된다. 지난 27일 현재 환율은 1475.50원으로 미국발 금융위기 여파로 전 세계 금융시장이 공황(패닉)에 빠졌을 때 급등(1534원, 2009년 2월 평균 환율)한 이후 최고 수준이다.

지난 한달 동안 원-달러 환율과 유로-달러 환율 추이. 원화의 가치가 달러 대비 유로의 가치보다 더 크게 하락했음을 보여준다. 서울외국환중개
 

환율은 ‘외환위기’를 트라우마로 기억하는 한국 경제에 가장 큰 불안이자 위협 요인으로 떠올랐다. 1997년 12월에 당시 보유 외환이 거의 바닥나 1달러당 약 1695원까지 치솟았다. 물론 그때와 달리 지금은 외환보유액이 4154억 달러(약 613조원, 11월 기준)에 이른다. 환율의 추가 상승을 제어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덕분이다. 그래도 방심할 수 없는 이유는 2021년 4692억 달러에 이르던 보유액이 지속해서 감소하고 있어서다. 최근 환율을 방어하기 위해 외환보유액을 계속 쏟아붓고 있어, 다음 달 초 한국은행이 발표할 외환보유액이 4천억 달러 아래로 내려갈 가능성도 있다. 무너진다면, 이는 지난 한 달 사이 환율 방어에 20조원 넘게 썼다는 의미가 된다. 대통령 윤석열이 말한 ‘불편’의 비용치곤 너무 비싸다. 앞으로도 한동안 환율은 고공행진을 이어갈 가능성이 커, 계엄 사태 뒤 환율 방어 누적 비용은 더 불어날 것으로 보인다.

계엄 뒤 증시에서만 79조원 증발 

계엄 이후 증시도 죽을 쑤고 있다. 이미 바닥권에서 오르내리던 증시는 비상계엄 뒤 대통령 윤석열에 대한 탄핵이 정족수 미달로 부결되자 2360.18까지 폭락했다. 다시 회복하긴 했으나 반등하지 못한 채 등락을 반복하며 지난 27일 현재 2400대를 겨우 턱걸이하고 있다. 증시는 경제의 선행지표이자 경제 심리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역설적이게도 누구보다 한국 증시가 저평가됐다면서 ‘밸류 업’(Value-up, 가치 상승)을 외쳤던 윤 대통령은 비상계엄으로 증시를 크게 ‘밸류다운’(Value-down, 가치 하락) 시켰다. 비상계엄 뒤 증시는 맥을 추지 못하면서 79조원이 증발했다. 시가총액은 2000조원 아래로 쪼그라들었다. ‘불편’이라고 하기엔 주식 투자자들의 손실이 너무 크다. 계엄 발 정치적 불확실성이 한동안 지속할 것으로 보이는 상황에서 증시는 확실한 반등의 계기를 당분간 찾기 쉽지 않아 보인다.

지난 한 달 동안 코스피 추이
 

계엄 뒤 정치적 불확실성의 증가로 인한 환율 상승과 주가 하락뿐만 아니라 가계의 소비와 기업의 투자 심리 또한 모두 꽁꽁 얼어붙고 있다.

한국은행이 27일 발표한 12월 기업경기 조사 결과를 보면, 이달 전산업 기업심리지수는 전달보다 4.5%포인트 낮은 87.0(100 이하면 경기를 비관적으로 전망)을 기록해 코로나19 팬데믹이 덮쳤을 때인 2020년 9월(83.0) 이후 4년 3개월 만에 가장 낮은 수치를 보였다. 이후 더 나빠질 가능성이 농후하다. 김학균 신영증권 리서치센터장은 “환율도 걱정이지만, 경제 지표 중 제일 크게 영향을 받는 건 기업의 투자다. 안 그래도 미국 대통령이 트럼프로 바뀌면서 투자하기가 좀 불확실한 상황이었는데 우리나라의 정치적 불확실성까지 겹쳐, 기업의 투자가 더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소비 지표도 추락 중이다. 12월 소비자심리지수는 전달보다 12.30 하락한 88.40(100 미만은 현재 경기가 과거 평균보다 좋지 않음)을 기록해 코로나19 팬데믹 초기인 2020년 3월(18.3)에 이어 가장 큰 낙폭을 보였다. 이는 세계 금융위기 때(12.6)와 비슷하다. 불확실한 정치, 경제 상황에서 가계는 소비를 줄이고 소비 시점을 미루기 마련이다.

가계 소비와 기업 투자의 위축은 결국 경제의 동력을 떨어뜨려 시간을 두고서 국내총생산(GDP) 감소로 나타날 것이다.

지난 16일 오후 서울 종로의 음식점 밀집 거리에서 한 가게 관계자가 영업을 시작하기 위해 입간판을 설치하고 있다. 연합
 

1호 공약과 국정과제 1호의 파기 

계엄으로 경제를 망가뜨렸지만 기실 대통령 윤석열은 ’민생’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의 후보 시절 1호 공약은 소상공인∙자영업자 살리기였다. 국정과제 1호도 소상공인∙자영업자의 회복과 도약이다. 그는 지난 2일 마련한 임기 후반 첫 민생토론회에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를 불러 놓고서 “전향적인 내수 소비 진작 대책을 강구”해서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이 살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면서 예산시장을 확 바꿔 놓은 백종원씨를 예로 들며 민간 상권기획자 1천 명을 육성하겠다고 밝혔다. 바로 다음 날 그가 선포한 계엄으로 1호 공약이자 국정과제 1호는 파기됐다. “21세기 상상하기 어려운 비민주적 상황”(필립 골드버그 주한 미국 대사)을 초래한 그의 극단적 선택은 특히 자영업자와 소상공인을 어려움에 빠뜨렸다.

소상공인연합회가 지난 10~12일 음식∙숙박업, 도∙소매업, 개인 서비스업 등에 종사하는 전국 소상공인 1630명을 대상으로 한 경기전망 긴급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88.4%가 '매출이 감소' 했다고 답했다. 연말인데도 계엄으로 예약 취소가 줄을 잇고 사람들이 지갑을 닫으면서 소상공인의 송년 특수는 실종됐다.

’이번 계엄은 다르다’

가장 가까운 계엄은 지금으로부터 43년 전 일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피살된 1979년 10∙26 다음날 선포된 계엄은 81년 1월24일 해제됐다. 무려 456일 지속했다. 그로 인해 환율과 증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지금과 단순 비교할 순 없다. 당시 환율은 ’단일변동환율제도’에서 ’복수통화바스켓제도’(80년 2월부터 시행)로 바뀌었으나, 두 제도 다 사실상 정부가 통제하는 방식이다. 80년 1월 정부는 환율을 484원에서 580원으로 20% 올렸으나 이는 계엄의 영향이라기보다 2차 석유파동(오일 쇼크)으로 인한 국제수지 악화에 대처하기 위한 정부 조처였다. 증시 또한 당시 영향을 논할 수조차 없을 만큼 규모도 작고 개방돼 있지 않았다. 1956년 대한증권거래소로 출범한 주식시장은 1981년 3월에서야 전산화 되었고, 1992년부터 외국인의 직접 투자가 가능해졌다. 따라서 1980년대 초 여전히 폐쇄적인 데다 금융시장이 성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계엄이 직접 미친 영향은 제한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국회 사무처가 지난 4일, 내란죄 피의자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이후 국회에 투입된 계엄군의 폐회로텔레비전(CCTV) 영상을 공개했다. 사진은 해당 영상 화면 갈무리. 국회사무처 제공
 

또 2시간 만에 실패한 계엄을 다른 나라와 비교하기도 쉽지 않다. 비상계엄 다음날 신한투자증권 리서치본부는 ‘비상계엄과 금융시장 영향’이란 제목의 보고서에서 해외 사례를 제시하면서 “계엄령 발동에 따른 영향은 길지 않았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2014년 태국 계엄령 발동 때 SET 지수는 1.6% 하락한 뒤 상승하고, 밧화 환율도 1.2% 평가절하된 뒤 1주일 만에 회복한 사례를 들었다. 또 2016년 튀르키예(옛 터키) 계엄령 발동 당시 BIST 지수가 13% 하락하고 리라화 환율도 6% 절하됐으나 10일 뒤 원래 추세대로 회복했다고 밝혔다.

다른 한편 아프리카 대륙의 많은 나라에서 ‘일상’이 된 쿠데타와 계엄은 이들 나라의 정치적 불안정성을 가중해왔고 이는 경제 성장의 발목을 잡아온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다. 계엄은 겉으로 나타난 지표보다 더 깊은 상처와 고통을 수반할 때가 잦다. 필리핀에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은 1972년 친위 쿠데타를 하면서 계엄령을 선포했고 1981년에서야 해제했다. 필리핀 계엄 박물관은 누리집에서 “마르코스는 1986년 축출될 때까지 권위주의 독재자로서 모든 권력을 유지했고, 계엄령의 효과와 유산은 마르코스보다 오래 지속하였다”고 기록했다. 72년 계엄령 선포 뒤 마르코스가 물러날 때까지 무려 14년 동안 필리핀의 1인당 지디피(GDP)는 1430달러에서 1570달러로 1% 상승했다. 사실상 정체됐다. 필리핀의 잃어버린 ’14년’이다. 이 수치 하나만으로도 필리핀이 얼마나 혹독한 계엄의 비용을 치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지금 상황은 과거 2번의 탄핵과도 다르다. 일단 강도가 너무 세다. 후진국에서 볼 수 있는 친위 쿠데타가 시도됐고, 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정치적 ’반동’과 불확실성도 과거보다 훨씬 크다. 이는 한국사회가 지불해야 할 정치∙경제적 비용 또한 과거보다 더 클 수 있다는 의미다. 한국은행은 지난 15일 낸 ‘비상계엄 이후 금융∙경제 영향 평가 및 대응 방향’이란 제목의 보도참고자료 맨 끝에 “향후 정치 상황 전개 과정에서 갈등 기간이 과거보다 길어질 경우에는 경제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이 확대”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아직도 그 경고는 유효하다.

1979년 12월13일 새벽 노태우 당시 9사단장 휘하 병력이 서울 광화문 앞에서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다. 한겨레 
 

계엄 뒤 한국 경제는 조타수를 잃은 배와 같다. 내부의 리더십 실종과 정치적 불확실성으로 트럼프의 복귀로 예고된 국제 정치∙경제 질서의 격변에 적응할 수 있는 시간과 기회를 놓치고 있다.

그나마 긴 시야를 갖춘 어느 경제학자는 부정 속 긍정을 되새긴다. 한국 경제학계 거두였던 학현 변형윤 선생을 기리는 학현학술상을 지난봄 수상한 이제민 연세대 명예교수(경제학)는 이렇게 짚었다. “한국이 분단과 냉전 체제의 권위주의 정권 아래에서 경제발전을 한 집단 기억이 너무 강해서 이런 시대착오적인 일이 일어났다. 윤석열 대통령의 이번 쿠데타 속에 분단 냉전 체제의 인식이 그대로 녹아 있다.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다 반국가세력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우리가 한 단계 나아가려면 한 번쯤 거쳐야 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민주화의 성공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쿠데타를 제대로 극복하지 못하면 우리나라는 진짜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 이 유산을 빨리 청산하고 극복하면 한 단계 더 나아갈 수 있다.”            < 한겨레 류이근 기자 >

 

모두발언 없고 기자질문도 안 받아...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수습대책 논의

우원식 국회의장(오른쪽)과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30일 국회에서 만나 대화하고 있다. ⓒ 국회사진취재단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30일 오전 국회를 방문해 우원식 국회의장과 면담하고 정국 상황에 대해 논의했다.

무안공항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가 발생한 다음날인 이날 최 대행과 우 의장은 모두 왼쪽 가슴에 근조 리본을 달고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만남을 가졌다.

헌법재판관 3명의 임명과 쌍특검(내란특검, 김건희특검) 등 탄핵 정국 관련 현안과 관련한 논의 내용에 초미의 관심이 집중됐으나, 통상적인 공개 모두발언 없이 곧바로 비공개 면담으로 들어간 데다가 만남 후 기자들의 질문도 받지 않는 바람에 정확히 무슨 얘기가 오갔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박태서 국회의장 공보수석은 만남 후 기자들에게 "최 대행과 우 의장이 제주항공 참사에 대해서 사고 수습과 유가족 지원 대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면서도 "궁금해하는 정국 현안에 대해선 확인해 드릴 게 없다"고 말했다.

이날 면담에 정부 측에서는 방기선 국무조정실장, 김진명 기획재정부 기획조정실장, 강영규 기재부 대변인이, 국회 측에서는 조오섭 의장비서실장, 곽현 정무수석, 박태서 공보수석이 배석했다.

우원식 국회의장(오른쪽)과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30일 국회에서 만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국회사진취재단
 


최 권한대행 "사고 조사과정 투명하게 공개하겠다"

한편 최상목 대행은 이날 오전 8시부터 정부서울청에서 열린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4차 회의에서 "정부는 유가족과 부상자의 뜻을 최우선으로 하여 가용자원을 총동원해 사고수습을 지원하는 중"이라며 "관계기관 협력을 통해 유가족 지원, 부상자 치료 등에 대해 한 치의 소홀함 없이 대응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정부는 국토부 중심으로 통합지원센터 운영해 유가족이 궁금하거나 답답해하는 일을 조기에 설명드리고 해결하겠다"며 "사고 수습 절차와 과정에 대해서도 유가족분들께 알려드리겠다"고 말했다.

특히 "어제 특별재난지역이 선포된 만큼 필요한 지원이 적기에 집행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최 대행은 "국토부와 경찰청에는 엄정한 사고원인 조사를 진행해주실 것을 당부드린다"며 "최종 결과가 나오기 전이라도 사고조사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해서 유가족에게 알려주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항공기 사고 재발방지를 위해 국토부는 항공기 운영체계와 관련해 안전점검을 실시할 것"을 지시했다.

최 대행은 "항공안전체계를 전반적으로 혁신함으로써 더 안전한 대한민국으로 나아가는 것이 이번 조치의 본질"이라며 "제주항공 측에서도 유가족과 부상자들께 적극 협조해 엄정한 사고 원인분석 이뤄질 수 있게 해주시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최 대행은 마지막으로 "최근 민생의 어려움 속에서 불의의 사고까지 발생해 권한대행으로서 마음이 아프다"며 "유가족에 대한 위로와 국민 일상을 지키기 위해 국정을 차질없이 관리해나가겠다"고 강조했다.  < 오마이 김경년 기자 >

"합법적 탄핵 비판, 내란죄 우두머리 탄핵 반대 주장으로 12·3 내란을 지지·선전"

 

 

 
윤석열즉각퇴진 울산운동본부는 30일 오전 울산경찰청에 홍유준 울산시의원을 내란선동·선전 혐의로 고발했다. 주성미 기자
 

내란죄 피의자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을 반대한다는 펼침막을 도심 곳곳에 내건 울산시의원이 내란선동·선전 혐의로 경찰에 고발됐다.

윤석열즉각퇴진 울산운동본부는 30일 오전 국민의힘 소속 홍유준 울산시의원을 내란선동·선전 혐의로 수사해달라는 고발장을 울산경찰청에 접수했다.

앞서 이들은 기자회견을 열어 “홍 시의원은 비상계엄을 통해 헌정질서를 유린한 윤석열에 대한 합법적인 탄핵을 비난하고 내란죄 우두머리의 탄핵을 반대하는 주장으로 12·3 내란을 지지·선전하고 있다”고 밝혔다.

홍 시의원은 지난 25일 오후 자신의 지역구인 울산 동구 일산동과 전하동 일대 10곳에 ‘대통령 탄핵 절대 반대 우리가 지켜야 합니다’라고 쓴 펼침막을 걸었다.

홍유준 울산시의원이 지난 25일 오후 울산 동구지역에 내건 펼침막. 윤석열즉각퇴진 울산운동본부 제공
 

윤석열즉각퇴진 울산운동본부는 “내란죄 우두머리를 지켜내자는 것은 이미 국헌문란의 목적으로 실행행위로 나아간 12·3 내란의 완성을 주장하는 것”이라며 “내란죄 수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시점에서 국민의힘 당원이나 지지자 등을 대상으로 이러한 취지의 발언을 공개적으로 이어가는 것은 내란 선전·선동에 해당된다”고 주장했다.

홍유준 시의원은 한겨레에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을 옹호할 의도는 없고, 개인적으로 아쉬운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고도의 정치적 판단에 따른 통치행위고 대통령 고유권한으로 볼 수도 있는 만큼 헌법재판소의 판단을 기다려야 한다”고 말했다. 현수막을 건 이유를 묻는 질문에는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까지 줄탄핵하며 국정을 마비시키려는 더불어민주당을 향한 경고의 의미”라고 답했다.    < 주성미 기자 >

촛불행동, 국민의힘 국회의원 55명 ‘내란 공범’ 고발

계엄해제 불참, 탄핵안 반대 일관

 

 
 
27일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국가수사본부 앞에서 촛불행동 관계자 등이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국민의힘 내란공범 국민고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
 

비상계엄 해제요구안 표결에 불참하고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에 반대표를 던진 국민의힘 소속 국회의원 55명이 ‘내란죄 공범’으로 경찰에 고발됐다.

촛불행동은 27일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국가수사본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윤석열의 직무가 정지됐지만 내란 수괴를 비호하는 공범들이 여전히 그 자리를 차고앉아 활개를 치고 있다”며 “내란 공범들로 인해 비상계엄이 해제된 지금까지도 사실상 법률상 내란이 지속되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이들은 추경호 전 국민의힘 원내대표를 비롯한 여당 소속 의원 55명을 내란실행 방조, 직무유기 혐의로 국수본에 고발했다. 이들 국민의힘 의원 55명은 지난 4일 국회의 비상계엄해제 요구안 표결에 불참했고, 이후 내란 상설특검법, 윤 대통령 등 신속체포동의안, 내란 특검법, 김건희 특검법 표결에서 일관되게 반대표를 던진 이들이다. 촛불행동은 고발장에서 “권성동 등 국민의힘 소속 의원들은 윤석열 등의 ‘내란죄 성립’을 부정하는 발언을 일삼고, 한덕수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하여금 헌법재판관 임명을 하지 않도록 해 탄핵 절차를 무기한 지연시키려는 꼼수를 쓰고 있다”며 엄정한 수사가 필요하다고 촉구했다.

촛불행동은 한 대행 역시 ‘헌법재판관 임명 보류’는 직무유기 혐의로, 양곡관리법 등 6개 법안에 대한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는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혐의로 고발했다. 한 대행은 대통령의 고유 권한인 재의요구권은 행사하면서 국회 몫 헌법재판관 임명은 ‘여야 합의 때까지’ 보류하겠다고 밝혀 비판을 사고 있다.

피고발인에는 국민의힘 의원 55명과 한 대행 외에도 △비상계엄 당일 사전 국무회의에 참석한 국무위원 9명 △조태용 국가정보원장 △심우정 검찰총장 △박세현 검찰 비상계엄 특별수사본부장 △이호영 경찰청장 직무대행 등이 이름을 올렸다. 고발인은 권오혁 촛불행동 공동대표를 포함한 시민 764명이다.    < 한겨레 이지혜 기자 >

 

 미국 역대 대통령들 중 가장 장수
 퇴임 이후 더 빛난 대통령으로 기록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2002년 12월 노벨평화상 상패를 들어 보이고 있다. AP 연합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29일(현지시각) 100살을 일기로 별세했다.

카터는 2023년 2월 이후 연명 치료를 중단하고 호스피스 돌봄을 받아온 고향 조지아주 플레인스의 집에서 눈을 감았다고 그의 가족이 밝혔다. 아들 칩 카터는 “아버지는 나뿐 아니라 평화, 인권, 사심 없는 사랑을 믿는 사람들 모두의 영웅이었다”고 성명을 통해 밝혔다.

카터는 미국 역대 대통령들 중 가장 장수했다. 정치적으로는 4년 단임(1977~1981년)에 그치면서 성공한 대통령으로 불리지는 못했다. 그러나 백악관을 나온 이후 중동과 한반도 등의 평화 문제에 적극 나섰다. 자원봉사에도 적극 참여하는 등 세계 평화를 위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받고 퇴임 이후가 더 빛난 대통령으로 기록됐다.

카터는 1924년 조지아주의 시골 플레인스에서 태어났다. 해군사관학교 졸업 뒤 당시 개발이 본격화된 핵잠수함 분야에 배치돼 촉망 받는 장교였다. 그러나 1953년 땅콩 농장을 운영하던 아버지가 사망하자 군복을 벗고 가업을 물려받았다.

카터는 1960년대에 들어 조지아주 등 남부를 중심으로 흑인들의 권리를 위한 민권운동의 바람이 부는 가운데 흑백 통합을 주장하며 1962년에 조지아주 상원의원으로 당선돼 정치에 입문했다. 1970년에는 조지아 주지사로 당선됐다. 이어 전국적 지명도가 높지 않은 상태에서 민주당 후보로 대권에 도전해 1976년 선거에서 승리해 제39대 미국 대통령이 됐다.

선거 상대인 공화당 소속 제럴드 포드 대통령이 워터게이트 사건의 그늘에서 못 벗어난 것도 그의 승리에 기여했다. 리처드 닉슨 행정부의 부통령이었던 포드는 닉슨이 1974년 8월 워터게이트 사건 때문에 사임하자 대통령직을 물려받았는데, 이후 닉슨을 사면해준 게 여론의 반발을 불렀다.

카터는 재임기에 높은 물가와 이를 잡기 위한 고금리 정책 등의 탓에 인기가 높은 대통령이 아니었다. 특히 대선이 있던 해인 1980년에 발생한 이란 주재 미국대사관 인질 구출 실패 사건이 결정적으로 재선 행보의 발목을 잡았다. 이란 학생들은 1979년 11월에 미국대사관에서 직원들과 그 가족 등 90명을 인질로 잡았는데, 1980년 4월에 이들을 구출하려는 ‘독수리 발톱 작전’ 과정에서 헬리콥터와 수송기가 충돌해 미군 특공대원 8명이 숨졌다.

카터는 같은 해 11월 선거에서 공화당의 로널드 레이건에게 패했다. 외교에서 도덕적 가치를 내세운 카터는 재임 때 한국 정부의 인권 탄압을 이유로 주한미군 철수를 추진하는 등 박정희 정권과 대립하기도 했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1차 북핵 위기 때인 1994년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을 만나고 있다.
 

카터는 퇴임 뒤 아내 로잘린과 함께 ‘사랑의 집 짓기’ 운동에 참여하는 등 봉사와 평화 정착 활동에 나섰다.

1차 북핵 위기가 발생한 1994년에는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을 만났다. 그와 김 주석은 미국이 제재 추진을 중단하면 북한도 핵개발을 동결한다는 합의를 했고, 전쟁 발발 가능성까지 거론될 정도이던 한반도 긴장이 완화됐다. 이는 그해 10월 북·미가 제네바합의에 이르는 데도 기여했다. 또 카터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적 공존을 위한 ‘2개 국가 해법’ 실현을 위해 나서는 등 중동 평화를 위해서도 노력했다. 카터는 재임 때인 1978년 이스라엘과 이집트 간의 평화 협정(캠프데이비드협정)을 중재하고 퇴임 뒤에도 세계 곳곳의 분쟁 해결을 위해 노력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2년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됐다.

카터는 말년에 도널드 트럼프의 재집권 가능성을 걱정하기도 했다. 10월1일에 만 100살이 된 그는 8월에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에게 투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메시지를 손자를 통해 밝혔다. 그는 생일 직후 사전투표를 했지만 해리스는 낙선했다.

카터의 동향인으로 그와 77년간 결혼 생활을 한 아내 로잘린은 지난해 11월 조지아주 플레인스의 집에서 먼저 세상을 떠났다.   < 워싱턴/이본영 특파원 >

‘별세’ 지미 카터 전 대통령…냉전 승리와 미국 혁신 기반 만들어

퇴임 뒤 빛을 발한 전직 대통령 롤 모델
‘유약해 보였으나 가장 강한 대통령’
진보적 가치와 독실한 기독교 신념이 대중에 호소
퇴임 뒤에는 평화봉사로 존경받아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2021년 7월10일 결혼 75돌 축하연에서 아내 로잘린의 발언을 듣고 있다. AP 연합
 

‘재임 때보다는 퇴임 뒤에 빛을 발한 대통령’

29일 100살을 일기로 별세한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은 흔히 퇴임 대통령의 ‘롤 모델’로 평가받는다. 그가 퇴임 뒤 펼친 분쟁 해소를 위한 평화 활동 및 지역 봉사 때문만은 아니다. 혹평을 받았던 재임 시절의 정책도 시간이 갈수록 가치를 인정받고 있기 때문이다.

1977년부터 81년까지 카터의 재임 동안 경제불황, 석유 위기, 주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사태 등으로 미국의 위상과 지위는 바닥을 쳤다. 이런 ‘미국의 위기’시기에 카터는 인권 외교와 도덕 정치만을 앞세운 ‘유약한 대통령’, ‘실패한 대통령’이라는 혹평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정책과 대응은 미국을 혁신하고, 소련 붕괴의 씨를 뿌려 냉전에서 미국을 승자로 만든 기반을 조성했다는 평가를 뒤늦게 받고 있다. 이는 퇴임 뒤 그가 펼친 헌신적인 평화 및 봉사 활동과 맞물려, 가장 성공적인 전직 대통령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조지아 플레인즈의 땅콩 농장 집안에서 1924년에 태어난 카터는 미국 남부의 보수적인 복음교단인 남침례교의 독실한 신자로 성장했다. 그는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잠수함 장교로 근무했다. 부친이 숨지자 퇴역해 가업을 물려받았다. 아버지의 빚과 형제 사이의 재산분할로 카터는 거의 물려받은 것이 없었지만 땅콩 농장을 재건하는 데 성공했다. 그가 고향에서 땅콩 농장을 경영하던 1950~60년대, 미국 남부에는 민권운동이 몰아쳤다. 보수적인 고향 분위기에도 그의 양심적인 기독교 신앙은 흑백분리 반대와 민권운동 찬성으로 그를 이끌었고, 이는 그가 정계로 나가는 동기가 됐다.

1979년 3월 캠프데이비드 협정에 따라 맺은 이스라엘과 이집트 사이 평화조약 체결식 때 미국 백악관에서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당시 대통령(왼쪽부터)과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 메나헴 베긴 이스라엘 총리가 악수를 하고 있다. 카터 센터
 

그는 1963년 조지아 주의회 상원의원으로 당선된 데 이어, 1970년에는 주지사로도 선출됐다. 카터는 민주당 주지사 후보 경선에서 소수인종을 위한 ‘어퍼머티브 액션’(배려 정책)에 기반한 흑백분리 반대를 내걸고, 현직 주지사를 물리쳤다. 그가 주지사로 재직하던 1970년대 전반은 리처드 닉슨 당시 대통령의 워터게이트 사건과 베트남전 후유증으로 정치권에 대한 대중의 불신과 실망이 절정에 오를 때였다.

무명의 시골 주지사였던 카터는 1975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이 시작되자 출사표를 던지며 다크호스로 부상했다. 그는 참신했고 신뢰할 수 있는 경력이 있었고 그가 내세운 ‘인권과 도덕’은 좌우를 넘어 호소력을 발휘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 해군 장교, 땅콩 농장 경영주, 민권운동 정치인이란 경력을 가진 카터는 도덕성이 실추한 기존 정치권을 질타하는 ‘도덕과 인권’ 가치를 내세워, 진보와 보수 양 진영 유권자들에게 반향을 일으켰다. 특히, 진보적인 가치를 설파하는 복음주의 기독교 신자 카터는 기독교 우파 세력들로부터도 지지를 받아냈다. 이에 힘입어 카터는 닉슨 사임 뒤 대통령직을 승계한 제럴드 포드를 간발의 차로 누르고 1976년 당선됐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2015년 8월 애틀랜타주 조지아에 있는 카터센터에서 자신의 암 투병에 대해 말하고 있다. 카터 센터
 

취임 뒤 그는 대외정책에서 인권 외교 및 분쟁 해소를 내세웠다. 친미 동맹국들의 인권탄압에도 강경하게 대처했다. 한국에 대해서는 당시 박정희의 유신체제에 압력을 가했고,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해 주한미군 철수 공약까지 내걸었다. 주한미군 철수는 미 군부 내의 강경한 반대로 백지화됐으나, 카터의 압박은 유신체제 붕괴의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또한, 중동에서 최대 친미 동맹국이었던 이란의 팔레비 국왕 체제에도 압력을 가해, 반정부 세력이 활성화됐다. 이는 1979년 팔레비 왕조를 타도한 이란 이슬람 혁명으로 이어졌다. 이란 이슬람 혁명은 과격파 학생들이 테헤란에 있는 주 이란 미국 대사관을 점거해 대사관 직원들을 인질로 삼는 사태로 이어져 카터의 재선을 무산시킨 부메랑이 되기도 했다.

1994년 6월17일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왼쪽)과 김일성(오른쪽) 북한 주석이 대동강 유람선 위에서 두번째 회담을 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재임 시절 카터는 대외정책에서 굴직한 치적들을 남겼다.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역사적인 평화조약인 캠프데이비드 협정을 중재했고, 미국 제국주의의 상징인 파나마 운하를 반환했으며, 소련과의 전략무기제한협정2(SALT2)를 타결지었다. 하지만, 오일쇼크에 이은 스태그플레이션이 지속되다가 임기 후반기에 들어서는 1979년 이란이슬람혁명으로 2차 오일쇼크가 엄습했다. 스리마일 핵발전소 사고, 주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위기,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등이 겹치며 지지율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특히, 주이란 미국 대사관 인질 위기와 구출작전의 실패는 재선을 앞둔 카터에게 치명적 타격이 됐다.

1980년 대선에서 카터는 강한 미국을 주장한 공화당의 보수파 로널드 레이건에게 대부분의 주에서 패배해, 압도적인 선거인단 표차로 참패했다. 공화당과 보수파들은 인권과 도덕이라는 이상주의만 내세운 카터가 소련 등 경쟁국에 무른 대응을 해서 미국을 나락으로 떨어뜨렸다고 공격했고, 이런 평가는 공식처럼 굳어졌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 그의 국내외 정책은 미국을 혁신하고 냉전에서 승리하게 한 원동력으로 재평가받는다.

우선, 그는 소련의 인권문제와 관련해, 소련 및 동구권 국가들의 반체제 세력을 후원하는 정책을 강력히 밀어붙여 1980년대 후반 소련 및 사회주의권 붕괴의 씨앗을 뿌렸다는 분석이 나온다. 1979년 소련의 아프간 침공에 맞서 모스크바 올림픽 보이콧을 주도하고, 소련을 아프간 수렁에 빠뜨린 무자헤딘 투쟁을 적극 지원했다. 보수파 및 군비확산론자들이 반대하던 전략무기제한협상2를 타결해, 방만한 미 국방비를 줄이면서도 군비 현대화의 기틀을 만들었다. 이는 미국이 1980년대 레이건 시절 소련을 압도하는 군사력 우위를 구축하는 바탕이 됐다.

1960년대부터 미국 대통령과 대외정책을 지켜보며 중앙정보국장 및 국방장관을 역임한 공화당 계열의 로버트 게이츠는 가장 유약하다고 평가받은 카터가 사실은 소련 붕괴의 씨앗을 뿌린 가장 강경한 대통령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카터 행정부의 선전과 비밀공작이 궁극적으로 소련 붕괴를 가져온 체제 균열을 야기했다”고 지적했다. 또, 게이츠는 카터 시절에 린든 존슨 행정부 시절부터 추진해온 국방 현대화와 전략무기 세대교체가 본격적 결실을 맺었다고 강조했다. 오일 쇼크에 대처하기 위한 연비 효율화 및 대체에너지 개발 등도 카터 때 시작됐다. 이 모든 정책은 소련을 압도하는 미국의 경쟁력으로 나타났다.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유례없는 참패로 재선에 실패한 카터는 대중들에게 잊혔다가 1980년대 중반부터 정력적인 사회활동으로 새롭게 조명받기 시작했다. 그는 1982년 카터센터를 세워 인권 신장에 나섰고, 세계 각국을 돌면서 평화협상, 선거감시, 질병퇴치 등의 활동을 이끌었다. 특히, 현재 활발한 국제적인 선거감시 활동도 그에 힘입었다.

1994년 빌 클린턴 행정부가 북한에 대한 폭격을 을러대던 1차 한반도 북핵위기 때 대담하게 방북해 김일성 주석과 면담을 통해 북-미 협상과 남북정상회담을 중재한 것도 퇴임 뒤 그의 대표적인 평화협상 행보로 볼 수 있다. 팔레스타인 주민 인권 보장을 주장하고 이스라엘의 평화협상 파기를 일관되게 비난해, 미국 보수파들의 공적이 됐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2002년 그는 이런 활동으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노숙인들과 무주택자들을 위해 집을 지어주는 해비타트 운동은 그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80살이 넘은 그가 망치를 잡고 집을 짓는 모습은 전 세계에 강렬한 인상을 줬다. 그는 집짓기 노동으로 몇번이나 낙상해 골절상을 입기도 했다. < 한겨레 정의길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