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패였던 홍 장군, 죽어서 후손들에 의해 모독
지금의 한국 현실, 만주벌판보다 더 혹독한 전장
내동댕이쳐지는 영웅, 잔혹극의 극치
불패의 독립영웅 홍범도 장군이 첫 ‘패배’를 당한 것인가. 살아서 백전백승이었던 그가 죽어서 처음 패배를 당한 것인가. 그 한 번의 패배는 그러나 살아서의 백패보다 더한 단장(斷腸)의 고통이다. 그리던 조국에서, 같은 민족에 의해, 게다가 후배 군인들을 키우는 학교 교정에서 내동댕이쳐짐으로써 이 노병은 살아서 겪지 않았던 치욕과 모독을 당한 것이다. 항일무장투쟁의 영웅에게 후손들에 의해 가해진 잔혹극의 극치라고 해야 할 일이다.
2023년 순국 80주기에 당하는 또 한 번의 죽음이다. 동포들이 자신의 어깨에 붙여준 대한독립군 총사령관의 견장을 떼이듯 가격당하고 난타당했다. 조국에 의해 가해진 만행은 일제의 군경에 의한 어떤 가혹한 형벌보다도 참혹한 고문이다.
육사 교정에서 국방의 간성이 될 후배들을 벅찬 심정으로 바라봤을 그의 눈은, 압살당하고 유린당한 그의 영혼은 비분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북간도 벌판을 호령하던 장수의 강철같았던 심장이 갈갈이 찢기고 있다. 일본군이 스스로 '하늘을 나는 장군(飛將軍)'이라고 부를 정도로 일제 관동군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이의 불 붙은 듯 이글거렸을 이 노병의 눈이 비통의 울음을 울고 있다.
그의 육신이 돌아갈 조국이 없었듯 그의 혼백은 다시 속할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 80년간 천만리 이역을 떠돌던 혼령은 머리 둘 곳이 없게 됐다. 자신이 온몸을 던져 구하려고 했던 고국으로부터, '나라를 버리는 이들'에 의해 참담하게 버림을 받고 있다.
그의 흉상이 육사 교정에 세워진 지 5년, 그의 유해도 이미 2년 전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환국은 그것으로 완성된 게 아니라는 것을 이번의 흉상 철거 사태는 보여준다. 그를 모독하는 이들로 인해서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를 아직도 잘 모르기 때문이다. 그에 대해 잘못 알려졌거나 그의 삶과 공적에 대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이 너무도 많다.
홍범도 장군을 42년간 연구해온 이동순 시인이 올해 삼일절에 맞춰 내놓은 평전 『민족의 장군 홍범도』에서 “항일 무장투쟁의 중심인물이지만 구소련 지역에 머물러 살았다는 점과 유생이 아닌 서민 출신이라는 점 등을 이유로 독립운동사에서 왜곡되고 폄훼되어온 홍범도 장군의 전 생애를 재조명하려 했다”고 말했듯이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고의적으로 소외하고 폄훼해 온 그를 대한민국은 아직 진정 모시지 못하고 있다.
그에 관해 잘못 알려진 사실들 중 가장 큰 오해는 그가 머슴 출신으로 일자무식이라는 것인데, 낮고 천한 신분 출신인 것은 그의 신화를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의 혁혁한 전과의 경위는 그가 단지 용맹과 사격술만이 아니라 스스로를 단련시켜 문무 겸비에 이르지 않았으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임을 보여준다.
도올 김용옥 교수가 10여 년 전 극동 러시아 국립문서보관소에서 찾은 그의 한문 편지 하나가 이를 증거한다. 유학자 의병장인 의암 유인석 앞으로 보낸 이 서한의 ‘洪範圖(홍범도)’라는 초서체의 선명한 이름 석 자가 드러내는 것은 누구보다 뛰어났던 지략과 전술의 한 이유를 보여준다.
공산당 가입은 독립 위한 방편이었을 뿐
그를 육사 교정에 둘 수 없다고 트집을 잡는 이들은 그가 공산당에 가입한 것을 전향하지 않았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그에겐 버릴 공산주의라고는 애초부터 없었다. 1922년 모스크바의 원동민족혁명단체회의에 참가했을 때 그를 조선의 독립영웅으로 먼저 만나자고 했던 것은 레닌이었고, 홍범도는 레닌에게 요청해 흑하사변으로 감옥에 갇혀 있던 독립군 대원들을 석방시킬 수 있었다. 레닌과의 만남이든 그로부터 받은 권총 선물이든 모두 민족의 독립과 해방의 수단이며 방편이었고, 동포들을 구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뿐이다.
1937년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이주 정책에 따라 수송열차에 실려서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쫓겨나 남은 생을 한인 극장의 경비원과 방앗간 노동자로 일했던 그에 대해, 소련 치하 카자흐스탄에서 공산당을 탈당하지 않은 것이 용납할 수 없는 죄과라는 것인가.
그의 죽음이 해방을 불과 2년 앞둔 1943년이었다는 것은 이번의 흉상 철거 사태와 겹치면서 마치 스스로 선택한 시간의 죽음이었을 수 있다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그는 해방 이후 조국에서 펼쳐질 통분스런 일들을 예견했던 것이어서 그걸 차마 볼 수 없어 스스로 눈을 감았던 것인가. 그의 유해의 봉환이 78년 만에야 이뤄졌던 것에는 자신의 흉상이 내동댕이쳐지는 치욕을 예감하기라도 했던 것인가.
그에게 안식을 주지 않는 조국, 지금의 대한민국의 현실은 그에게 만주벌판보다 더 혹독한 전장이 되고 있다. 꺾이지 않았고 물러서지 않았고 굽히지 않았던 그를 무너뜨리고 유린하는 이들은 과연 누군가.
봉오동, 청산리 대첩 직후 일제 관동군은 비열 잔인한 보복에 나섰다. 간도의 경신대참변에 대해 박은식 선생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일본군들은 조선의 민간인들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죽였다. 총으로 쏴 죽이고, 칼로 찔러 죽이고, 몽둥이로 때려 죽이고, 도끼로 찍어 죽이고, 산 채로 땅에 묻고, 솥에 삶고, 가죽을 벗기고, 허리를 자르고, 팔다리를 자르고, 사지에 못을 박았다. 인간이라면 차마 할 수 없는 짓을 오락으로 삼았다."
일본군-한국군으로 이어지는 계보
이것은 일본군의 실체이자 이들의 행태를 이어받은 한국군의 한 갈래, 해방 후 저질러진 제주 4.3 사태, 거창 민간인 학살, 광주 5.18 등으로 '면면히' 이어지는 일본군-한국군의 계보의 한 실상이다.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들어낸 자리에, 일제하에서는 관동군의 후예가 되기를 자처했고, 해방 후에는 국군으로 재빨리 변신해 일본군 때의 수법 그대로 민간인을 살륙하던 인물이 '원수님'으로 추앙돼 그의 동상을 세운다는 흉흉한 소식이 들리고 있다.
그러나 한편 동시에 부하의 억울한 죽음의 진상을 덮으려는 부당한 명령을 거부함으로써 대한민국 군인 정신이 살아 있음을 보여준 해병대 군인이 있다.
한국군은 이 두 갈래 길 중에서 어느 쪽의 길을 갈 것인가. 홍범도 장군, 그리고 또 다른 '홍범도들', 독립항쟁의 산하에서 무명전사로 사라지고 만, 수많은 '홍범도들'이 죽은 육신으로도 감기지 않는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다. < 이명재 에디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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