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자 칼럼] 부부(夫婦)

● 칼럼 2012. 6. 3. 13:50 Posted by SisaHan
신달자의 소설 <물위를 걷는 여자>를 읽다가 이 한 구절에서 내 눈 길은 잠시 서성거릴 수밖에 없었다. 

 “결혼은 책임이고 사회적인 구성원으로서 의무  이기도 해. 생활이란 평범한 것에서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구원을 받는 경우가 많지. 결혼은 사랑이고 이해이고 나눔이고 양보야.
  증오도 치욕도 배신도 형편없는 상실감도 결혼 안에 있어” 

결혼연령이 점차 뒤로 물러가고 있다. 20대에서 30대로 심지어는 40대 미혼도 주변에서 흔히 만난다. 결혼이 두려워서일까? 일생을 한사람과 함께 살 자신이 없어서일까?
결혼하기 전 동거형식의 실험 결혼생활은 이젠 별로 낯선 이야기도 아니다. 그렇게 하겠다는 자녀를 나무랄 수만도 없다. 결혼했다가 이혼하는 것 보다 서로를 알아가면서 코드가 맞으면 
부부의 연을 공식으로 맺겠다는 것이다. 이러면서 가족계획을 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 아니냐는 젊은이들의 사고방식이 조금씩 전통적인 결혼관에 젖어있는 구세대를 흔들어놓고 있다.
      
신록의 5월은 결혼의 계절이기도 하지만 가정의 달이기도 하다. 결혼 초년생으로부터 10년 20년 30년…차 부부들이 가족을 이루며 사회 공동체, 국가 공동체 세계 공동체, 일원으로 살고 있다. 단일민족에서 다문화 가족 구성원으로 확대되어 가면서 민족과 민족 간의 혼혈은 더 이상 금기 사항이 아니다. 그만큼 가족 간의 갈등과 상호 불협화음은 커질 수밖에 없다.  
결혼이 연애의 무덤이라 했던가. 가시덤불 속으로 뛰어 들어 가는 모험을 감수해야 한다고 했는가. 아름다운 산책로를 손잡고 걸어가는 낭만의 꿈을 기대했던 신혼초의 꿈은 그리 너그럽지 못한 결혼생활 현실 속에서 낭만의 파편조각만 절망스럽게 바라보길 얼마나 했던가.       
나도 4년이란 세월의 교제 끝에 부부란 인연을 맺고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되도록  50년을
살아오고 있다. 두 아이는 장성한 사회인으로 각자의 인생길을 걷고 있다. 이 긴 기간을 살아오면서 사랑과 꿈만 있었던 것도 아니다. 가난도 병고의 고통도 배신도 절망도 있었다. 이혼을 왜 생각해 보지 않았던가. 뛰쳐나가고 싶었던 순간인들 한 두 번이었겠는가. 나만 그렸겠나. 남편도 그랬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은 이해이고 양보이고 나눔이란 그 질서를 지키려는 과정 속에서 지속되었다. 남편 속에서 나를, 내 속에서 남편을 발견하며 헌 신발 신고 산골짜기 길 걷는 편안함 때문에 안정감이 있다. 사랑에서 연민으로 이질감에서 동질감으로 부부의 관계도 진화하는가 보다.
 
성서가 가르치는 고린도 전서 13장을 다시 곰곰이 읽어본다. 사랑이 내포하고 있는 모든 엑기스를 뽑아 올려놓았다. 2천 년 전 사도 바울의 사랑에 대한 속성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묘약이 되고 있다. 인간관계의 이치는 예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다름없음을 말해주고 있다.
 『사랑은 오래 참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모든것을 견디느니라…』
했다. 그리곤 믿음 소망 사랑 이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란 말로 끝을 맺는다. 
가난과 병고도 성격차이로 인한 갈등도 감내할 각오 없이 부부의 연을 맺는다는 것은 모험이요 위험한 것임엔 틀림없다.
서로 사랑할 때 보다 결혼 위기에 직면 할 때 신앙은 중보자의 역할을 해준다. 부부는 작은 교회란 생각을 해본다. 중간 중간 인벤토리도 해 보며 부부의 연을 재점검하다 보면 결혼의 서약이 생활 속에 녹아들어가 끝까지 남는 것은 자식이 아니고 부부밖에 없다는 자각에 이를 것이다. 참고 견디며 살아온 것을 억울해 할 필요 없다. 끝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인생살이 자체가 그러한 것이니까. 
그래도 두 낯선 사람이 부부가 되어 해로(偕老)하면서  ‘평생 함께 살아주어서 고마워’ 이 한마디 나눌 수 있다면 그 결혼은 성공한 것이리라. 두 손 잡고 걸어가는 노(老) 부부의 뒷모습이 저녁 노을만큼이나 멋이 있지 않겠는가?

< 민혜기 - 수필가, 캐나다 한인문인협회 전 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