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통영 그리고 어머니의 함박웃음.
임순숙 수필가
이른 아침 지척에 있는 ‘남망산 공원’ 산책길에 나섰다. 공원은 삼면이 바다인 통영의 지형을 축소한 듯, 어디에서든 선 자리에서 고개만 돌리면 크고 작은 섬을 품은 남해안 바다가 다양한 풍경으로 뭇시선을 사로잡는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출중한 외형적 요소에다 나의 문학소녀의 꿈을 키우던 곳이라 수시수시 드나들기를 좋아한다.
흔히 동양의 나폴리라 일컫는 아름다운 통영항구를 끼고 약간 돌아가면 제법 가파른 공원길이 시야에 들어온다. 시작부터 난이도가 꽤 있지만 길 위에 흩뿌려진 붉은 동백꽃을 손바닥 위에 하나 둘 올리다 보면 어느 사이 산 중턱에 올라와 있다. 대나무 숲 사이로 멀리 통영대교가 아른거리고, 새벽 조업을 위해 분주했을 아침바다엔 겹겹의 산 그림자가 그 빈자리를 메우고 있다. 자연의 경이로움과 나의 미욱함이 뒤엉켜 아! 하는 탄성이 새어나올 즈음 청마 유치환의 ‘깃발’ 시비(時碑)가 발길을 잡는다. 새파랗게 이끼 낀 행간 사이 사이로 그냥 너답게 살라는 강한 펄럭임이 온몸을 전율케 한다.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중략) < 청마 유치환의 시, ‘깃발’ 중 >
꼬불꼬불 이어지는 노송숲, 동백숲을 거닐다 보면 이 고장이 배출한 문화, 예술계 거장들의 숨결을 도처에서 느끼게 된다. 자연이란 거대한 전시장에서 다도해의 잔잔한 물결을 배경 삼은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만난다는 것은 큰 축복이지 싶다. 두어 시간 자유로운 행보 끝엔 습관처럼 우리집 찾기에 열중한다.
보일 듯 말 듯, 아흔을 훌쩍 넘긴 어머니의 숨소리를 닮은 정든 집이 아련하게 잡히면 마음은 또 나락으로 떨어진다. 긴 타국살이의 불효를 조금이라도 면하려 당신 곁을 지키고 있지만 늘 미흡하여 반성문 쓰기 바쁘다. 나이가 들면 다시 아이가 된다는 그 시점의 어머니를 인지하지 못하고 예전의 당신으로 착각하여 번번이 우를 범하고 있다. 다행히 어머니를 함박웃음 짓게 만든 사건이 최근에 있어 스스로 면죄부를 주려 한다.
‘비진도’에서 낚시를 즐기는 친구부부와 제법 큰 고기를 몇 마리 낚아 올렸다. 하지만 이놈들은 낚시바늘에서 벗어나기 무섭게 애처로운 울음소리를 내어서 번번이 놓아주어야 했다. 결국 빈 망태기로 돌아온 사연을 들으신 어머니가 얼마나 웃으시든지 …
머리 허연 노장들이 어린 고기한테 당했다며 내내 함박웃음을 터트리셨다.
며칠 후엔 예전의 실수를 만회하려 또 낚싯대를 드리웠다가 손바닥만한 고기 한마리를 잡았다. 이를 보신 당신은 또 함박웃음을 터트렸다. 평생 낚시를 즐기시던 아버지의 망태기에선 한번도 보지 못한 고기를 낚았다며 또 얼마나 즐거워하셨는지 모른다. 아무리 고기가 귀해도 낚시꾼의 망태기엔 결코 들지 못한다는 ‘망상어’란 고기가 또 한번 큰 웃음을 선사했다. 장모님을 위한(?) 고기잡이 구실이 생긴 셋째 사위는 오늘도 겨울바다에 나설 궁리를 한다.
돌아오는 길은 늘 활어(活魚)로 넘쳐나는 중앙어시장을 경유한다. 삶에 대한 열기가 최대치로 치솟는 현장의 아침은 고요했다. 불과 몇 시간 후 또 새로운 역사가 이루어질 그곳에서 밑반찬 몇 가지를 샀다. 돌아와 장바구니를 펼쳐보니 낯선 봉지가 또 나온다. 상인이 몰래 넣어준 감사의 표시,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는 말은 이를 두고 함인가 보다. 이미 몇 번의 경험이 있음에도 그때마다 전해지는 감동은 배가 된다. 오랜 타국생활에서 잊고 지냈던 통영인심이 아직도 건재하고 있음에 고무된 산책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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