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올림픽은 끝났지만 아직도 자리에 누우면 가끔씩 박주영의 감각적인 드리블, 양학선의 그림 같은 착지 장면이 아른거릴 때가 있다. 장미란, 손연재의 눈물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이보다 더 전이긴 하지만 개막행사 2부, 병상 위에서 뛰어놀던 영국 아이들 모습도 진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일부에선 좌파 올림픽이라 비난했다지만 무상의료제도(NHS)에 대한 영국의 자부심이 오롯이 담겨 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로 상징되는 영국 복지제도는 지식인사회의 정책 개발과, 정치권의 타협을 몰아붙인 대중들의 힘이 결합해 만들어낸 작품이다. 전문가들의 복지국가 청사진이 자유당 사회개혁가 윌리엄 베버리지 주도로 1942년 발간한 ‘베버리지 보고서’에 담겼고, 그 핵심이 무상의료였다. 수십만부나 팔릴 정도로 보고서가 대중들의 열광적 지지를 받았는데도 기득권 세력을 대변한 처칠의 보수당은 이를 외면했다가 총선에서 쓴맛을 봐야 했다. 보수당과 영국의사협회의 저항을 무력화시킨 건 노동당에 대한 지지로 복지사회에 대한 기대를 폭발시킨 유권자들이었다. 이후 1979년 대처의 보수당 정부가 들어선 뒤 89년부터 일부 시장원리를 도입하는 등 변화가 있었으나 무상의료의 큰 틀은 흔들림이 없었다.
좀 다른 얘기지만, 핀란드의 교육개혁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시민들의 압도적 지지가 바탕이 됐다. 1966년 제1당이 된 사회민주당은 인민민주당과 연립정부를 꾸렸고 다른 정당까지 가세해 범정파적으로 ‘교육개혁’을 최우선 목표로 정했다. 이후 정권은 바뀌었으나 ‘평등과 협동’ 원칙은 손대지 않았다. 초당적으로 교육개혁의 방향과 원칙에 합의한 뒤 세부 설계는 국가교육청장을 비롯한 교육전문가들에게 맡겼다. 교사 출신의 에르키 아호는 1972년부터 1991년까지 20년간 국가교육청장을 연임하며 오늘날 세계 제1로 평가받는 핀란드 교육개혁을 완성해냈다.
올림픽뿐 아니라 이제는 우리 정치에서도 ‘양학선2’ 같은 남부럽잖은 정책이 나올 때가 됐다. 대선을 앞두고 일자리와 복지, 경제민주화가 최대 쟁점이 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지만 우선순위에서 밀려나 있는 게 교육문제다. 우리 교육은 ‘위기’에서 ‘붕괴’ 국면으로 치닫고 있다. 사교육비는 살인적 수준으로 치솟고 청소년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1위다. 그런데도 교육정책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평등’에서 ‘경쟁’으로 냉·온탕을 오가는 바람에 학생들만 실험실 모르모트처럼 피해를 보고 있다. 백낙청 교수가 이미 갈파했듯이 2013년 체제에서 가장 달라져야 할 것도 교육이다. 이제는 혁명적 수준의 개혁이 필요하고 초당적 대책이 나오지 않으면 안 될 막다른 골목에 몰렸다.
정파를 넘어 교육개혁기구를 설치하자는 제안이 나온 지는 10년 이상 됐고, 여야와 진보·보수단체 모두 사실 비슷한 얘기를 해왔다. 2002년 대선을 앞두고도 한나라당과 민주당, 전교조와 한국교총 모두 국가교육위나 교육개혁국민회의 등 이름만 달랐지 초당적 기구가 필요하다고 했다. 지난해 6월 진보교육감들의 교육혁신 선언에 이어 최근 교육개혁100인위원회 등 시민단체들을 중심으로 초당적인 국가교육위원회 설치 운동을 벌이고 있다. 국회에 교육계획위원회를 두어 정권과 무관하게 장기계획을 세우자는 심상정 통합진보당 의원의 제안은 검토할 만하다.
교육혁명의 초석을 놓는 데는 이번 국회가 적기다. 대통령 선거 뒤엔 임기 안에 실적을 내려는 욕심 때문에 장기적 계획도, 초당적 접근도 어렵다. 여야가 협력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 힘은 유권자들만이 갖고 있다. 깨어 있는 시민들이 움직일 때다.
< 김이택 -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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