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자 칼럼] 가을에 머무는 생각들

● 칼럼 2012. 10. 16. 14:42 Posted by SisaHan
‘논산집’에선 혼자 있을 때가 많다. 혼자 있으면 밥이 문제다. 혼자 먹는 밥은 맛이 없어서 설령 냉장고에 반찬이 많이 있어도 꺼내 먹을 마음조차 생기지 않는다. 이른바 ‘절필’하고 용인 변방의 외딴집에서 혼자 3년여 살 때도 몸무게가 많이 줄었는데, 이제 생각하면 그 이유가 모두 밥 때문이다. 혼자 먹을 때는 단지 생존을 위한 식사인지라 김치 한 가지만 내놓고 물에 만 밥으로 겨우 공복을 때우기 일쑤다.
아내가 따라 내려와 있으면 식사 시간이 원만하다. 따뜻한 밥과 국을 정갈히 차려주는 건 물론이고 식사 동행이 있으니 식욕이 상한가로 발휘된다. 결함이 있다면 계속 아내의 잔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래 함께 산 아내는 어느덧 그 포즈가 ‘늙은 어미’ 같아져서 철없는 막둥이가 된 듯이 잔소리를 종일 들어야 삼세끼 밥을 얻어먹는다. 아내가 늘 돌보는 집이 아닌바, 보는 것마다 마음에 차지 않아 잔소리를 참을 수 없는 모양이다. 이래저래 ‘논산집’에서의 아내는 반가우면서 동시에 성가시기도 한 ‘손님’ 같은 존재가 된다.
2박3일 동안 아내가 내려와 있다가 올라가는 길. 저녁을 먹고 읍내까지 데려가 버스를 태워 보내고 나니 쓸쓸하면서도 홀가분한 기분이다. 차를 몰고 혼자 호숫가 집으로 되돌아오는데 어느새 수북이 깔린 낙엽이 노변에서 밤바람에 들까불며 날린다. 어떤 벚나무는 그 잎이 이미 붉어 단심으로 종언을 고하고 있고, 어떤 낙엽송은 아직 푸른 청춘의 모습을 고집스레 지키고 있다. 그래 봤자 도긴개긴이라, 머지않아 낙엽은 다 져서 제 근본인 뿌리로 돌아갈 터이다. 버스 속에서 손을 흔들어주던 아내의 얼굴이 어둔 호수와 낙하하는 나뭇잎들 사이에 잔영으로 남아 있다. 그녀에게 “언젠가 네 곁에서 죽을 것”이라고 말한 것이 벌써 40년 전의 일이다.

모든 연애는 필연적으로 ‘일상화’의 과정을 겪는다. 이 수상한 세월 속에서 낭만적 사랑만으로는 아무것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나날이 깨달아야 되는 제도권 결혼생활에선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결혼을 통해 사랑을 지킨다고 생각하는 건 어떤 의미에선 착각에 불과하다. ‘연애’는 나날이 조금씩 까먹고 그 자리에 ‘우의’를 더께로 쌓는 것이 결혼생활일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꼭 쓸쓸해할 일만은 아니다. ‘연애’란 고도의 생물학적 긴장상태일 터, 만약 계속 뜨거운 연애를 지속해야 한다면 일찍 죽게 될 게 확실하다. 연애의 ‘일상화’는 그러므로 우리를 오래 살게 만든다. 지혜로운 자는 오래 산다고 하지 않던가. ‘연애’를 ‘우의’로 바꿔가는 걸 ‘지혜’라고 불러도 좋은 이유가 거기 있다.
순서는 알 수 없으나 아내와 나는, 젊은 날 철없이 맹세했던 그대로 어쨌든 ‘곁에서 죽는 것’을 지켜보게 될 날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시간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감수성이 예민해 아직도 매일 죽고 매일 살아나는 인생을 사는 나 같은 사람이 굴절 많았던 세월 속에서 아내와 함께 이만큼이나마 지내온 것은 전적으로 아내의 사랑이 나보다 깊고 넓었기 때문이다. 그걸 모르지 않지만 그렇다고 이런 걸 성공이라 부를 수는 없다. 물론 실패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삶을 성공과 실패로 나누어 보는 것은 나쁜 버릇이다. 취향에서 아흔아홉 가지가 다르고 겨우 한두 가지쯤 같은 타인과 만나 이렇게 오래 함께 걸어온 근원적인 힘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

가을이다.
가을은 초월을 생각하게 만든다. 초월은 허황한 것이 아니다. 초월적인 꿈이야말로 최종적으로 주체의 근원과 맞닿아 있다고 믿는다. 나는 어디에서 비롯돼 어디를 어떻게 지나와 오늘, 여기 있는 것일까. 속절없이 나뭇잎 지는 계절과 만나면 생각은 저절로 여기에 이른다. 회자정리(會者定離)의 인생이다. 오래 함께 걸어와 이제 갈무리의 계절에 당도해 있으니 아내는 이미 나의 초월적인 꿈속에 깃들어 있다. 삶의 연속성이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져 온 먼길이려니와, 과연 나의 초월적인 꿈속에 들어와 이 가을, 함께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되며 또 누구누구일까.

< 박범신 - 작가, 상명대 석좌교수 >